도서 소개
시와세계 시인선 56권. 김덕현 시집. 한 시인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방식으로 '밤'을 선택하게 된다면 이것은 현실과의 불화를 진술하는 그만의 또 다른증언 방식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밤은 어둡다. 밤은 미지의 영역이고, 미지는 불확실하고 불확정적인 세계이다. 그런 현실은 불안하고 두려운 결핍의 영역이다.
어둠 속에서 현실의 삶을 대변하고 신을 대체하는 ‘샤먼shaman’의 그것처럼 시인은 자신 속에서 어둡고 습한 수많은 타인을 경험하기도 한다. 수많은 타인은 타인의 이름을 빌린 시인 자신이며 그는 밤과 구분되지 않는 타인 속의 또 다른 자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일상의 어법을 벗어난 비문들, 그 비문들의 무례함 때문에 당혹스럽기도 하고 때로는 시인의 진정성을 의심하게 되기도 한다.
김덕현 시의 모든 행간에 출몰하는 비문이라고 하는 그의 문장들은 당황스럽고 낯설지만 기괴스러운 풍경이 만들어지기도 한다. 그 비문들이 행간 깊숙한 곳으로 들어와 시라는 장르를 얼마나 확장 시킬 수 있는지, 일상의 문법을 얼마나 타파할 수 있는지, 독자를 얼마나 조롱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무엇보다 평면적으로 읽히고 끝날 시의 입체적 해석을 가능하게 하고있다는 것은 큰 강점이라고 할 수 있겠다.
출판사 리뷰
■■ 서평 ■■
비문들, 혹은 신화적 언어
송종규
-나는 밤과 구분되지 않는다-
한 시인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방식으로 <밤>을 선택하게 된다면 이것은 현실과의 불화를 진술하는 그만의 또 다른 증언 방식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밤은 어둡다. 밤은 미지의 영역이고, 미지는 불확실하고 불확정적인 세계이다. 그런 현실은 불안하고 두려운 결핍의 영역이다.
어둠 속에서 현실의 삶을 대변하고 신을 대체하는 ‘샤먼shaman’의 그것처럼 시인은 자신 속에서 어둡고 습한 수많은 타인을 경험하기도 한다. 수많은 타인은 타인의 이름을 빌린 시인 자신이며 그는 밤과 구분되지 않는 타인 속의 또 다른 자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일상의 어법을 벗어난 비문非文들, 그 비문들의 무례함 때문에 당혹스럽기도 하고 때로는 시인의 진정성을 의심하게 되기도 한다. 김덕현 시의 모든 행간에 출몰하는 비문이라고 하는 그의 문장들은 당황스럽고 낯설지만 기괴스러운 풍경이 만들어지기도 한다. 그 비문들이 행간 깊숙한 곳으로 들어와 시라는 장르를 얼마나 확장 시킬 수 있는지, 일상의 문법을 얼마나 타파할 수 있는지, 독자를 얼마나 조롱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무엇보다 평면적으로 읽히고 끝날 시의 입체적 해석을 가능하게 하고 있다는 것은 큰 강점이라고 할 수 있겠다.
세상은 불온하고 어둡고 결핍으로 가득 차 있으므로 불화로 가득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불화로 가득한 세상은 불안하고 낯선 세계일 뿐이다.
이런 결핍과 불안이 일반화되거나 객관화되고 이완되는 것을 거부하고 부정하는 방식으로 그만의 독특한 진술 방법을 택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시간이 지난 후에 이 어둠과 절망의 인식이 희석되는 일반적인 과정을 거부할 수밖에 없는 어떤 절실함이 ‘나는 밤과 구분되지 않는다’ 라는 슬픈 고백을 하게 하는 것.
이런 비애의 감정이 인간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불가사의한 현실의 여러 화두에서 출발하지만 김덕현의 그것은 온통 ‘어둠’ 뿐이라고 진술하는 절망의 인식에서 온다.
어둠(결핍)은 자신의 존재를 진술하기 위한 장르이면서 슬픔의 한 형식으로 쓰여지고 있다.
이 시인의 시는 언제나 현실과 초현실의 경계에 놓여 있다. 현실은 초현실의 세계로 전이되고 이 두 개의 세계는 언제나 한 편의 시 안에서 존재한다.
파도가 파도를 들고 일어서는 밤이에요 수면은 공책이었다가 파도였다가 거품처럼 나는 해안을 몰고 다닌다 수면으로 뜨거워지는 발가락 잃어버린 문장들 물고기를 상상하는데 나는 수면으로 뛰어든다 수면을 만나 수면을 쓰러뜨린다 맨발을 꺼내 무어라 소리치지만 들리지 않아 순간 물수제비가 날아오른다 물이 어깨를 딛고 나를 물의 가장자리로 내려놓는다 나는 수면을 들고 수면에 누워 수면을 처방한다
파랑이 거대한 자갈밭으로 달려나간다
해안이 해안 속으로 충돌한다 눈을 뜬 채 물고기들은 모래를 뒤적거린다 나는 항상 새 것 같은 수면을 꺼내 입는다 밤마다 수면의 가장자리로 걸어간다 수면이 계속 걷고 모르는 사람들이 계속 지나간다
물고기들이 너무 많이 겹쳐서 투명한 수면을 전염시킨다 헤엄치며 수면을 다 써버린다 갈매기들이 수면을 쪼고 오후 한때의 수면은 두 동강 난다 수면 하나가 노랗게 빵을 부풀리고 나는 수면을 꺼내 허공에 묶는다
방치된 밤들이 수면 아래 저장되고
-<물 위를 걷는 물고기>, 전문
-야생의 언어들, 혹은 불구의 언어들-
무겁고 힘든 어둠의 이미지들을 때로는 발랄하고 가볍게 들어올리는 힘이 김덕현에게 있다. 가볍지만 가볍지 않은 진정성이, 무겁지만 주저앉을 수 없는 어떤 힘이 그의 문장 안에 있다. 무엇보다 이미지들이 비약하고 확산하는 놀라운 팽창의 현상을 그의 시에서 읽는다.
‘오후 한때의 수면은 두 동강 난다’ ‘수면 하나가 노랗게 빵을 부풀리고’, ‘ 나는 수면을 꺼내 허공에 묶는다’ 수면을 만나 수면을 쓰러뜨리고, 물의 어깨를 딛고 나를 물의 가장자리로 내려놓는다, 나는 수면을 들고 수면에 누워 ‘수면을 처방한다’. 수면은 이미 수면의 사전적 의미를 벗어나 있다.
<수면>이 이처럼 현란하게 변신한다. 시인은 현란하고 놀라운 이미지들의 비약과 변환을 아주 천연덕스럽게 하고 있다. ‘수면을 꺼내 허공에 묶는다’ 라니! 수면 위에 누워 ‘수면을 처방한다’라니! 이 많은 변칙적인 문법으로 시인이 불가해한 현실의 결핍을 극복하고 자유롭게 유영할 수 있는 공간을 시 속에 생성시키는 것이다. 다시, 나는 밤과 구분되지 않는다는 시인에게는 영혼이 자유로울 수 있는 무한한 상상력의 공간이 필요했던 것 아닐까.
특히 주목할 점은 시 속 각 행들은 어떤 서사를 완성하기 위한 방편이나 주제를 향해 집중해 있는 것이 아니라 독립된 하나씩의 문장으로 존재한다. 주제를 아예 무시하거나 건너뛰면서 포획한 그의 각각의 문장은 기이하고 낯선 또 다른 세계를 완성하고 있는 것이다.
밤으로 종일 서 있었다 밤을 천천히 꺼낸다 밤들은 나를 둘러싸 벽처럼 서 있고 우리는 밤새 아무 일도 없어서 밤이 날마다 찾아와 밤이 피고 지고 새벽은 언제 도착하나요 아침이 자꾸 돌아와 서 있고
뜨거운 가면을 벗어버리고 차갑게 식어버린 아스팔트 하이힐이 밤으로 걸어간다 캄캄해진 것들이 박스처럼 쌓인다 우리는 박스를 하나씩 펼치고 기억나지 않는 얼굴들이 바스락거린다
밤은 무엇이든 삼켜버린다 새들은 깃털이 없고 얼굴이 없는 물고기 우리는 아무렇게나 매달려 있다 밤은 움직이지 않고 나는 밤과 구분되지 않는다 어지럽게 날아다니며 무수한 나를 멈추고 우리는 우두커니 바닥나 서 있다
오늘 부르는 노래는 오래전 가라앉은 해적들의 노래 난파선에서 검은 깃발을 따라 월광 소나타가 울리고 우리는 가라앉는 목소리로 노래 부른다 가라앉는 것들을 위하여 뱃머리는 악보를 따라 반딧불, 이 반짝거린다 우리는 밤을 계속 켜 두기로 한다
-<캐리비안의 해적>전문
새벽이 도착하지 않는 시, 어둠 속에 아무렇게나 매달려 있는 시, 우두커니 바닥나 서 있는 시, 무수한 나를 멈추는 시, 그러나 이 캄캄한 밤을 계속 켜두기로 한다는 온통 벼랑뿐인 시, 이율배반적인 시, 나는 우두커니 바닥나 있다는 시, 그러므로 “나는 밤과 구분되지 않는다”는 문장으로 자신을 압축하는 슬픔의 형식으로 자신을 증명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삶이라는 화두 속에서 건진 어두운 습한 슬픔의 기록들.
깃털이 없는 새들, 얼굴이 없는 물고기는 밤이 삼켜버린 불구의 언어들이지만 시인은 왜 ‘밤을 계속 켜두기로’ 한다는 것일까. 깊은 수심 속에 은둔하는 불구의 인간을 연상하게 하는 기괴한 문장들.
시인은 ‘캄캄해진 것’들이 박스처럼 쌓이고 우리는 박스를 하나씩 펼치고 ‘기억나지 않는 얼굴들’이 ‘바스락거린다’는 중첩된 이미지로 그를 에워싼 어둠을 강조하고 있다.
시의 문법은 물론 일상의 문법과 달라야 한다. 언어를, 신화의 언어와 일상의 언어로 구분한다면 성서를 포함한 종교적인 언어는 신화의 언어이다. 시 또한 일상적인 언어라기보다 신화의 언어에 속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당황스러운 비약이나 엉뚱한 비유나 논리가 맞지 않는 문장도 제대로 운용되면 시는 수용할 수 있다. 다만 그런 문장들이 요설이나 치기가 아니라 시의 언어로 살아남을 수 있는지, 그런 작업들이 어떻게 시라는 예술을 확대 시킬 수 있는지 고민하고 절제하는 것은 시인의 몫이다.
숱한 비문들로 가득한 시집 <물 위는 걷는 물고기>는 당황스러울 만치 일상적인 문법을 벗어나 있다. 기존 문법의 가치를 타파하고 무시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이런 자유분방함은 시인의 개성이고 자신감이기도 할 것이고 어쩌면 치기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항상 새것 같은 수면을 꺼내입는다”거나 “수면이 너무 많이 겹쳐서 투명한 수건을 전염시”키고 “헤엄치며 수면을 다 써버린다”, “갈매기들이 수면을 쪼고 오후 한때의 수면은 두 동강 난다” 거나, ‘나는 수면을 꺼내 허공에 묶는다”처럼 ‘수면’의 사전적 의미는 완전히 사라진다. 다만 시인이 만들어 내는 낯선 공간에서 ‘수면’은 수면이 아닌, 의미를 삭제한 ‘낱말’로 남아서 가공된 그의 역할을 수행한다. 이럴 때 시는 이미 초현실의 세계를 시 속으로 이입시키고 있다.
이 당황스럽고 심상치 않은 이미지들의 변환은 김덕현의 시 모든 곳에서 종횡무진하면서 독자를 혼란의 페이지 속으로 몰아넣는다. 이럴 때 일상의 질서는 혼란의 소용돌이에 갇히게 된다. 의도한 것이든 아니든, 이 이상하고 그로테스크한 문법은 망설임 없이 시라는 형식 속으로 들어와 그의 시집을 휘몰아친다.
이런 어긋나고 변형된 문법들은 이미지와 이미지를 충돌시키면서 그만의 시적 공간을 확보하고 있다. 이미지들은 비약하면서 새롭고 신기한 초현실의 세계를 생성하고 시의 공간은 넓어진다. 반복되는 어둠의 이미지에 덧씌우는 시인만의 독특한 기술 방식들은 그만의 낯설고 검은 풍경의 숲을 이루고 있다.
그의 언어는 신화의 언어이면서 야생의 언어이다.
모래 속 어딘가 너는 꼼짝도 않고 딴 얼굴을 꺼낸다 모래성을 쌓고 허물고 이윽고 사람들은 사막으로 빠져든다 잠에서 어디선가 본 것 같은 네가 자꾸 들락거리고
누군가 잠 속에 불을 켠다 잠들지 않는 사람들 잠을 자는 사람들 그들의 잠 속으로 커다란 전구를 달아놓을 것이다 어느 날인가 양들을 세던 풀밭 어딘가에 투명하게 드러난 적이 있다 잠이 잠을 벗고 일어나 잠은 하얗게 잊어버렸다 새 옷의 느낌이 좋다 옷장을 들락거리며 잠을 벗어버리고 새로운 꿈을 펼쳐 입는다
-<두리번거리는 잠을> 부분
그가 무어라고 했지만 알아 들을 수가 없어 나는 손을 뻗어 날아오르며 허공을 전염시킨다 공이 뛰어오르고 전염된 공이 되돌아온다 더 많은 새들이 떨어지고 지상에는 더 많은 톱니바퀴로 오염된다 함성들이 잘려 나간다 너의 두 발은 공의 바깥에 서 있고 잔디 깎는 기계는 잔디를 자꾸만 쓰러뜨린다 우리는 셔츠를 나누어 입는다 셔츠로 전염된다 너는 날아 오르지만 허공은 닿을 수 없는 바닥 무엇을 어디로 보냈는지 모르는 우편물들이 되돌아오며 펄럭인다 너는 알아들을 수 없는 고함을 친다 우리는 전염되는 잔디를 일으켜 세우며 공평한 잔디로 서 있다 바닥이 두리번거리며 카메라를 들고 있다. 공이 굴러간 곳에 등이 사라진 벤치 길게 누워 있다 잔디를 들어 올려 지상에서 누군가 휘슬을 길게 불고
환불 할까요?
-<노쇼> 부분
-환유로 쓰는 상처-
모래와 사막과 ‘딴 얼굴’을 꺼내는 ‘너’라는, 낯설고 단절된 현실 인식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상처의 한 단면이다. ‘나는 손을 뻗어 날아오르며’ 접촉한 허공이 전염된다는, 전염된 공이 다시 되돌아오고, 나누어 입은 셔츠로도 전염되고 마는 불안하고 아픈 정서는 물론 시인의 내면의 풍경에서 연루된다. 자신을 확신 할 수 없으므로 손 닿는 데마다 감염시킨다는 진술이 가능해진다. 더 많은 새들이 떨어지고 더 많은 톱니바퀴로 오염된다는 환유는 불행하고 슬픈 어느 하루가 아니라 이 시인의 모든 순간이다.
자신의 상처와 결핍을 공과 새와 톱니바퀴와 셔츠라는 타자에게 이입시키면서 불행과 결핍을 확대시킨다. 이유 모를 우편물은 되돌아오고 알아들을 수 없는 고함소리는 삶의 변두리에서 번번이 산화하고 만다.
<두리번 거리는 잠>, <노쇼>에서 보듯이 하나의 문장 안에 얼마나 많은 생경한 이미지들이 출현하는지 비약하면서 변환하는지, 시인이 자신의 결핍과 상처를 얼마나 집요하게 고백하는지 읽을 수 있다.
김덕현의 시에서 문법이나 시적 논리를 말하는 것은 이미 아무 의미가 없다. 혼란스럽고 뒤틀리고 엉뚱한 그의 문장 안에 그의 시적 논리는 존재한다.
언어가 언어 이전의 어떤 형식과 절차를 벗어나서 기존 문법을 뛰어넘고 있다는 말이 되겠다. 어쩌면 태초의 언어란 이런 것이고 시의 언어는 태초의 언어여야 하지 않겠는가. 기존 문법을 뛰어넘는다는 것은 시가 가져야 할 소중한 덕목이기 때문이다. 서두에서, 시는 일상의 언어가 아니라 신화적 언어에 가깝다고 말한 바 있다.
다소 어색하고 당황스럽더라도, 다소 정제되지 않고 무리하게 보여지더라도, 시는 이런 개별화 된 감성을 담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한 시대와 한 공간과 하나의 의미에 머무르지 않는 확장과 의미의 비약은 보다 큰 문학 작품을 만들 수 있게 되고 시인에게는 영혼의 자유로움을 향유할 수 있는 특권이 되는 것이다. 이럴 때, ‘교차로’라는 한정된 공간에 출몰하는 ‘흰 사막’과 ‘강물’을 동시에 만나고, ‘제 자리를 벗어나 달의 뒷면에 다다른’ ‘너’라는 우주적인 교감을 체험하게 되기도 하는 것이다.
문장들이 따라 웃는다 멈춘 연주는 계속 되어야 해 어느 날인가 신호등이 깜빡이고 질문은 나를 삼키고 있어 교차로에서 흰 사막들이 돌아와 캄캄해지는 강물입니다
빈 상자들이 쌓이고 있어 뜨거운 아스팔트 움켜쥔 햇살 한 조각 계단은 알파인가 오메가인가 흰 새들이 날아오르고 풍경을 터트리며 날개를 지운다 손가락을 떠난 흰 달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바닥은 누가 두고 갔나 바코드를 스캔한다 네가 아닌 것처럼 문 앞에는 그림자 하나 빈 칸을 두드리는 인기척들 밤이 내려와 우리는 밤이야 여기에서 저기에서 쏟아져 내리는 사라 진 나무들 지워지는 빈칸으로 자정을 기다리는 여기서부터 밤이야 자정이야 메아리가 들리지 않아 하얀 밤이야 눈을 감는다 새벽이
두텁다 폭설 하얗게 질문을 삭제하며 우리는 자정으로 투명해지고
새벽을 꺼내 다시 읽는다
-<그림자놀이 전문>
붉은 신호등이다 달리다 멈춘 횡단보도 그걸 불면이라 부를까 해석할 수 없는 색으로 너는 행인들 사이로 밀려들어 간다 흐트러지지 않고 거대한 잠으로 너는 꼼짝도 하지 않는다 내 귀에 확장되는 소리가 펄럭인다 비명이거나 고해성사이거나 공중에 매달리 것들은 비현실적으로 흔들거렸다
끊긴 대화는 모두 어디로 갔나 먼 하늘을 들고 스카이다이빙을 즐긴다 줄어들지 않는 거리로
넌 벽이 되고 투명한 발등을 건너는 중입니다
흰 나무 흰 빌딩 흰 바닥이 채워졌다 너는 납작한 화석처럼 굳어 박물관에 전시된 너를 뒤적거린다 맨발로 투명하게
너는 잠에 잘 섞이지 않아서 더 많은 밤이 필요해 꿈을 지나가는 행인들 우리는 잠을 들고 다니며 잠으로 연결된다로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자꾸 잠 속에 빠진다 우리는 또 다른 잠으로 널 꺼낸다 우리는 꿈을 계속 밝혀두기로 한다 너는 매일 잠으로 길을 잃고 잠으로 미끄러지고 미끄러져서
-<불면으로 이야기 해요>전문
나는 밤과 구분되지 않는다는 김덕현 시인에게는, 시간이나 장소 또한 구분되지 않는다. 교차로와 흰 사막과 강물이 한 컷의 시간, 하나의 공간 속으로 호명되고 있고 밤이 내려와서 ‘우리는 밤이야’ ‘여기서부터 밤이야 자정이야’라고 마치 땅따먹기 놀이를 하는 것 같은 장면을 연상하게도 한다. 자의적으로 밤이 스스로 밤을 규정하고 구획 짓기도 한다. 스스로 밤과 구분되지 않는다는 시인이므로 가능한 진술일 것이다.
“흰 새들이 날아오르고 풍경을 터트리며 날개를 지운다”거나, “손가락을 떠난 흰 달” 같은 뛰어난 이미지들은 시집 곳곳에 포진하고 있다. 이런 기법은 자연스럽게 우주적인 에너지를 발생하면서 아름다운 허구의 공간을 만들고 시의 내연을 확장 시키는 역할을 한다. 이런 이미지들은 마침내 다소 무리하거나 느닷없이 단절되거나 불안정한 그의 비문들을 옹호하고 있다.
‘빈칸을 두드리는 인기척들’!, ‘바닥은 누가 두고 갔나’!.
빈칸과 바닥은 이미 운명적으로 결핍인 삶의 불안정한 장르이어서 이 시인이 어둠을 동원하는 것처럼 빈칸과 바닥 또한 결핍의 동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빈칸과 바닥이 여기서는 전혀 다른 이미지로 변환하고 있다.
‘달리다 멈춘 횡단보도 그걸 불면이라 부를까’, ‘너는 잠에 잘 섞이지 않아서 더 많은 밤이 필요해’ ‘박물관에 전시된 너를 뒤적인다’라고 서술하는 시 <불면으로 이야기해요> 역시 행과 행 사이를 껑충 뛰어넘는 시인의 보폭이 예사롭지 않다.
‘흰 나무 흰 빌딩 흰 바닥이 채워’지고 ‘너는 납작한 화석처럼 굳어 박물관에 전시되고’ , ‘박물관에 전시된 너를 뒤적’이는 ‘나’에서 보듯 어느 것 하나 자연스럽게 연결된 구조는 아니다. 이미지들의 비약으로 걷잡을 수 없이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 것이다.
솔직히 이 시인의 시에 시비를 걸고 싶기도 하지만, 비문 가득한 그의 시를 신뢰할 수 없다 라고 말하고 싶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나는 김덕현 시인의 시를 읽으면서 현대시의 새로운 장르를 만난 것 같은 반가운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의 문법은 낯설고 불친절하지만 AI가 종횡무진 활약하고 있는 시대에 그의 시에는 분명히 언어를 가지고 사람의 영혼을 조롱하는 힘이 있다. ‘달리다 멈춘 횡단보도 그걸 불면이라 부를까’! ‘잠에 잘 섞이지 않아서 더 많은 밤이 필요’하다는 당돌한 서술 앞에서 시비를 걸고 싶었던 나의 의지는 사실 소진되어 가고 있다.
나는 지금 시인에게 설득당하고 있는 게 아닐까.
“시는, 타인의 영혼을 조롱하는 것이다, (Ts 엘리엇)”
시인의 자전적 기술인 시<본적은 서울 중구 황학동 1992번지> 는 춥고 암울했던 길 위의 삶을 그대로 옮겨적는다. 이 시는, 그가 구사하던 변칙과 비약과 충돌의 문법이 아닌 일상의 문법으로 유년의 체험을 적극적으로 기술해 간다. 유년의 삶은 아직도 기억을 지배하고 감성의 가장 아래쪽에 호수처럼 고여 있는 듯하다.
그곳은 추운 밤이고 피곤한 길 위의 삶이다. 아스팔트, 길, 바닥, 멍석 위로 수북한 감자 더미, 트럭에서 내려지는 경동시장 대파들, 김 미장원, 칼바람 속 식용유통 속에서 불타오르는 장작개비, 마늘 가게 외숙모, 화투패를 쪼이는 사내들. 젊고 고운 어머니, 그리고 열 살 소년.
치열하게 살아가는 길 위의 삶이 시끌벅적 살아있는 풍경이 작품, <본적은 서울 중구 황학동 1992번지> 속에 다 들어 있다. 어린 시절의 시인과 동행하면서, 시인이 왜 깊은 어둠 속에 갇혀 있는지에 대한 실마리가 약간은 풀리는 듯하다.
다른 작품들에 비해서 제법 느슨한 일상의 언어로 쓰여진 이 시는 시적 성취 여부를 떠나서 시인의 시를 이해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고 시인이 왜 그토록 어두운 곳에 집착하면서 의미를 단절시키고 뒤틀리게 한 불구의 문장들을 쏟아냈는지에 대한 의문 또한 조금 풀리기도 한다. 아마 지금도 눈 감으면 시인에게는 그 시절의 사람들과 풍경과 분위기가 그대로, 시장 바닥의 냄새까지도 그대로 생생하게 살아있는 듯 보인다.
그 시절 복잡하고 다난한 재래시장에서의 삶은 안락하거나 따뜻하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 거기 있지 않았을까. 어린 시인에는 추운 기억이고 출구 없는 캄캄한 시간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곳이 세상을 해석하고 각인하는 유일한 장소였고 한 시대가 거기에, 시인의 유년과 함께 고스란히 머물러 있는 것이다.
중앙지하상가 건너편 저기, 태양상회 안에 자그마한 체구의 여인 하나 물끄러미 내려다 보는 키 큰 사람 내 막내 이모다 쪼그려 앉아 야채들을 정리하는 손이 바쁘다. 가게를 지나 몇 걸음 경동시장 트럭에서 대파들이 내려지고 때맞춰 달호 아저씨 형제는 한 섬이요, 두 섬이요, 주거니 받거니 노래가 흥겹다 그 아래 좌측으로 두 번째 가게 목소리마저 다 쉬어버린 여인 하나 마늘 가게 외숙모가 기침하며 꾸벅꾸벅 졸고 하얀 육쪽마늘 제멋대로 생겨먹은 생강들은 산더미다 그 뒤로 서넛의 사내들이 둘러앉고 어떤 이의 귓바퀴에 걸터앉은 담배 한 개비, 화투패를 쪼이는 사내들 앞으로 시끌시끌 욕지거리다 마늘 가게 앞 지나 자그마한 열 살 소년 시장통에서도 미모가 유독 드러나는 젊은 여인 아이는 연신 다 터버린 손으로 대파들을 발가벗겨 봉투 속에 던져 묶는다
12월 찬바람 한가운데 걸터앉은 식용유통 장작들이 불타오르며 칼바람을 데우고 검게 그을린 낯빛조차 가리지 못한 하얀 얼굴의 아낙을 소년은 엄마라 부른다 대각선 길 건너 태흥포차 멍석 위로 수북한 감자 더미 누군가 장작을 밀어 넣어 불통이 쏟아낸 불꽃들이 날아오르며 새벽을 내려다본다 열 살의 겨울 방학은 황학동 중앙시장 탐구생활로 쓰여지고 쌓인 대파의 더미 속으로 겨울이 숨어든다 빨갛게 불타 죽은 소년의 겨울 방학 대파를 다듬으며 흐르는 눈물로 저장되고 있다
새벽 네 시면 엄마의 손을 꼭 쥐고 우리상회를 지나 잉꼬목욕탕을 지나 영복이네 집을 지나 민호네 김 미장원을 지나 깜깜한 얼음 속 중앙시장을 깨우러 간다 한겨울 새벽 찬 바람이 어느덧 동대문 중앙교회 언덕을 넘는다 빨간 십자가를 바라보며 숨을 헐떡이고 그때마다 소년의 간절한 기도 소리 시집 잘못 간 울 엄마 좀 잘 살게 해 달란다 아직도 아랫목 솜이불 속 누군가 코 고는 소리 나만 아니면 돼, 나만 아니면 돼, 그 바람에 이번 주도 교회 가긴 틀린 것 같아
겨울이 서둘러 스위치를 꺼버린다
-<본적은 서울 중구 황학동 1992번지> 전문
달과 별과 바다, 새와 물고기와 난파선과 월광소나타를 종횡무진 투입시켜 우주적 에너지를 발생케 했던 다른 시들과 달리 이 시에서 시인의 시선은 중앙시장 바닥에 머물러 있다. 그의 유년을, 한 시대를 살아간 치열한 사람들의 삶을, 잊을 수 없는 유년의 기억을 적극적이고 섬세하게 증언한다. 한 시대를 살다간 사람들의 개인사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지금도 계속되는 삶의 현장이고 우리의 역사이므로 춥고 어려웠던 그 시절을 기록하는 것은 소중한 일이다. 돌아보면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우리의 과거이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어둠을 발설하고 마침내 자신이 캄캄한 <밤>이 라는 인식은 집요하지만, 모든 순간을 ‘어둠’이라고 밖에는 진술할 수 없는 결핍의 절박함이 시인의 시에 묻어 있다.
중앙지하상가 한 모퉁이에는 아직도 쪼그려 앉아 있는 시인이 있다.
불구의, 신화의, 날것인 야생의, 막무가내의 어둠 속인 김덕현의 시를 따라오면서 든 두 가지 생각. 너무 무책임하지 않은가, 혹은 낯선 매력의 발견. 그 애매함의 경계에 그의 시는 놓여 있다. 다행히 이 시집은 그의 첫 시집이고 시인은 아직 젊다. 일상의 문법과 의미를 과감하게 타파하고 건너뛰는 시인의 패기는 존중되어야 하고 변칙적이고 실험적인 문장들도 존중받아야 한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약간 어설픈 듯 위장(?)한 그의 문장 안에서 발견한 놀라운 이미지들. 커다란 획 안에서 우주적 에너지를 발생시키고 교감하는 그로테스크한 그의 문장들을 발견한 것은 큰 소득이다 라고 말할 수 있다.
새것 같은 수면을 꺼내입고, 어둠으로 쌓아올리는 담벼락 같은 박스들, 뱃머리의 반딧불이 악보를 따라 반짝이는, 아무도 그의 흰 발을 아는 이가 없는, 잠과 잘 섞이지 않는, 무수히 허공을 오염시키는 결핍과 불안으로 무장한 이 쓸쓸한 시인에게, 나는 설득 당했을까. 엘리엇은 일찍이 시는 타인의 영혼을 조롱하는 예술이라 하지 않았는가.
행갈이도 없이 빽빽한 기이한 풍경의 숲을 빠져나와 이 시인의 시에서는 보기 드문 단아한 형태의 시 한 편을 인용한다. ‘빗소리로부터 튕겨’ ‘바닥을 이리저리 옮긴’다는 ‘바닥은 바닥을 자’르는 초현실주의적 상상력의 시인 김덕현의 <롤러코스트>가 아주 편안하게, 쉼표처럼 읽힌다.
종일 바닥을 기다린다
모두 어디로 가는 걸까
폭풍우가 세차게 치던 밤
비는 우리를 쓰러뜨린다
바닥을 지우고
바닥은 마를 날 있어도
빗소리는 그침이 없으니
우리는 빗소리로부터 튕겨
바닥을 이리저리 옮긴다
소리로 텅 비어 갔다 바닥은 만질 수 없는
바닥을 자른다 우리는 맨 위로 떠 오르고
바닥, 어디가 바닥인가
-<롤러코스터> 전문
본적은 서울 중구 황학동 1992번지
중앙지하상가 건너편 저기, 태양상회 안에 자그마한 체
구의 여인 하나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키큰사 내 막내 이
모다 쪼그려 앉아 야채들을 정리하는 손이 바쁘다 가게
를 지나 몇 걸음 경동시장 트럭에서 대파들이 내려지고
때맞춰 달호아저씨 형제는 한 섬이요, 두 섬이요, 석 섬
이요 주거니 받거니 노래가 흥겹다 그 아래 좌측으로 두
번째 가게 목소리마저 다 쉬어버린 여인 하나 마늘가게
외숙모가 기침하며 꾸벅꾸벅 졸고 하얀 육쪽마늘 제멋
대로 생겨먹은 생강들은 산더미다 그 뒤로 서넛의 사내
들이 둘러앉고 어떤 이의 귓바퀴에 걸터앉은 담배 한 개
비, 화투패를 쪼이는 사내들 앞으로 시끌시끌 욕지거리
다 마늘가게 앞 지나 자그마한 열 살 소년 시장통에서도
미모가 유독 드러나는 젊은 여인 아이는 연신 다 터버린
손으로 대파들을 발가벗겨 봉투 속에 던져 묶는다
12월 찬바람 한가운데 걸터앉은 식용유통 장작들이 불
타오르며 칼바람을 데우고 검게 그을린 낯빛조차 가리지
못한 하얀 얼굴의 아낙을 소년이 엄마라 부른다 대각선
길 건너 태흥포차 멍석 위로 수북한 감자 더미 누군가
장작을 밀어 넣어 불통이 쏟아낸 불꽃들이 날아오르며
새벽을 내려다본다 열 살의 겨울방학은 황학동 중앙시장
탐구생활로 쓰여지고 쌓인 대파의 더미 속으로 겨울이
숨어든다 빨갛게 불타 죽은 소년의 겨울방학 대파를 다
듬으며 흐르는 눈물로 저장되고 있다
새벽 네 시면 엄마의 손을 꼭 쥐고 우리상회를 지나 잉
꼬목욕탕을 지나 영복이네 집을 지나 민호네 김 미장원
을 지나 깜깜한 얼음 속 중앙시장을 깨우러 간다 한겨울
새벽 찬 바람이 어느덧 동대문 중앙 교회 언덕을 넘는다
빨간 십자가를 바라보며 숨을 헐떡이고 그때마다 소년의
간절한 기도 소리 시집 잘못 간 울 엄마 좀 잘살게 해달
란다 아직도 아랫목 솜이불 속 누군가 코 고는 소리 나
만 아니면 돼, 나만 아니면 돼, 그 바람에 이번 주도 교
회 가긴 틀린 것 같아
겨울이 서둘러 스위치를 꺼버린다
폭설, 그 투명함에 대하여
세상 모든 것이 딱딱했다.
순간 쏟아진 언어도, 몸짓도
얼음처럼 굳어버린 풍경들
비닐봉투 같아 바스락거리는
수정 닮은 눈보라가 친다
배경으로 멀어져가는 뒷모습
빛을 잃어버린 시간이야
사소한 말과 일상들이 꿈이었나
천천히 얼어붙기 시작한다.
밤이 깊어가고 설산은
기침이 자꾸 멈추질 않아
등 뒤로 흘러내린 독백들
검고 푸른 말들이 빙하로 차올랐다.
바닥은 이따금 따뜻했다.
닿지 않는 몸의 기억 바닥은
하양이 알몸으로 빛나고 있다.
새벽이 걷는다.
저기 눈보라가 걸어가네
느리게 아주 빠르게
밤들을 뒤적여 나는 잠들지 못한
폭설 하나를 꺼내 들고
여기 투명한 나무가 빛나고 있다.
그림자놀이
문장들이 따라 웃는다 멈춘 연주는 계속 되어야 해 어느
날인가 신호등이 깜빡이고 질문은 나를 삼키고 있어 교
차로에서 흰 사막에서 돌아와 캄캄해지는 강물입니다 빈
상자들이 쌓이고 있어 뜨거운 아스팔트 움켜쥔 햇살 한
조각 계단은 알파인가 오메가인가 흰 새들이 날아오르고
풍경을 터트리며 날개를 지운다 손가락을 떠난 흰 달 아
무것도 보이지 않아 바닥은 누가 두고 갔나 바코드를 스
캔한다 네가 아닌 것처럼 문 앞에는 그림자 하나 빈칸을
두드리는 인기척들 밤이 내려와 우리는 밤이야 여기에서
저기에서 쏟아져 내리는 사라진 나무들 지워지는 빈칸으
로 자정을 기다리는 여기서부터 밤이야 자정이야 메아리
가 들리지 않아 하얀 밤이야 눈을 감는다 새벽이
두텁다 폭설 하얗게 질문을 삭제하며 우리는 자정으로
투명해지고
새벽을 꺼내 다시 읽는다
작가 소개
지은이 : 김덕현
2018년 『시와세계』 등단
목차
시인의 말
제1부
본적은 서울 중구 황학동 1992번지
폭설, 그 투명함에 대하여
그림자놀이
서울의 달
My 브로드웨이
아이러니
박스 the 박스
물 위를 걷는 물고기
데자뷔
캐리비안의 해적
여기서부터
한 겨울날
미세먼지 수제비
미완성 교향곡
플라워 가든
빈 그물
불면으로 이야기해요
일방통행
담벼락에 뭐라고 쓰신 겁니까?
제2부
질문 있습니까
나를 스치고 지나가는 것들
레이싱
두리번거리는 잠을
지상에서 우리는
충분히 주무셔야 합니다
블랙박스
노 쇼
롤러코스터
수중발레
비상구
메트로시티
다이어트 그리고
오로라
자정이 오고 있다
이어서 자정 뉴스가 방송됩니다
무단횡단
눈싸움 그리고 눈덩이
제3부
판도라 행성
디지털 플레이어
눈앞에서 사라지는
바람이 만들어낸 숨소리
크레바스를 건너
퍼즐
테트리스(Tetris)
몇 층에 사십니까?
나의 노래
랑만살롱
Start once more
그네가 날아간다
문 앞에 두고 가주세요
뫼비우스의 띠
오후 한때
월요일에는
마스카라 K양
제4부
공책을 들고
아무것도 할 수가 없네요
파랑웨이브
단단한 책
Close E(eyes, ears, engine, energy)
눈은 내리고, 눈은
부뚜막에 고양이
쇼핑하러 가요
크리스찬 메모리얼 파크
큐브
응급센터
부서지며 미끄러지며
넌, 어디 갔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