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소개
1990년 〈문학세계〉 신인상과 1991년 〈시조문학〉 천료로 작품 활동을 시작한 정현숙 시인의 새 시조집 『길 위의 생』이 출간됐다. 『화포리에서』를 비롯한 여러 시조집과 동시조집을 펴내며 성파시조문학상 등을 수상한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 시간과 기억, 존재의 근원을 향한 깊은 성찰을 섬세한 언어로 풀어낸다.
정현숙의 시조는 삶 속에서 지나온 시간과 기억을 되살피며, 인간 존재의 본질과 세계의 질서를 탐색한다. 시인은 물리적 시간을 넘어 경험 속에서 재구성된 주관적 시간의 결을 시조의 정형 안에 담아내며, 서정적 순간성과 깊은 사유가 어우러진 언어의 장관을 펼쳐 보인다.
사물과 상황을 향한 섬세한 감각, 그리고 그 너머의 본질을 응시하는 시선은 그의 시조를 더욱 맑고 투명하게 만든다. 살아 있는 것들의 기운과 삶의 화음을 포착한 이번 시집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존재의 원형을 깊이 있게 사유하게 하는 시조집이다.
출판사 리뷰
정현숙 시인은 1990년 〈문학세계〉 신인상과 1991년 〈시조문학〉 천료로 문단활동을 시작한 이후 『화포리에서』 등 4권의 시조집과 동시조집 『강물이 그리는 음표』 등 2권의 동시조집을 발간한 역량있는 시조시인으로 성파시조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이번에 발간된 새로운 정현숙의 시조집 〈길 위의 생〉은 인간의 존재론적 근원에 대한 성찰을 적극 수행하면서 자신의 경험과 기억을 통한 기원origin 탐색의 열정을 섬세하게 담아낸 미학적 결실이다. 시인은 자신이 겪어온 시간을 다스리고 그에 대한 심미적 수납과 초월을 열망하는 일관성을 보여줌으로써 자신의 시편들을 ‘시간예술’의 정수精髓로 만들어간다. 이처럼 정현숙 시조의 내질內質은 ‘시간’과 ‘기억’을 되살피고 사유하는 원리에 의해 펼쳐진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번 시조집에는 이러한 원리가 서정적 순간성 속에서 펼쳐짐으로써 서정시가 추구할 수 있는 최대한의 언어적 장관이 가득 담겨 있다. 그만큼 정현숙의 시조는 비밀스럽고 오랜 근원적 소리를 들려주면서 세계의 근원적 질서와 가치에 대한 상상적 탈환 작업을 맑고 투명한 목소리로 전해준다. 이러한 작업은 한시적인 것이 아니라, 삶이 지속되는 동안 필연적으로 견지할 수밖에 없는 시인 자신의 존재 조건으로 승화하고 있다.
대체로 우리는 시간의 흐름 안에서 자신의 존재론적 동일성identity을 유지하고 완성해가게 된다. 사실 모든 생명이 태어나고 자라고 사라져가는 과정 자체가 시간의 흐름 속에서만 가능한 것일 터이다. 따라서 인간은 철저하게 시간-내적 존재로 살아가고 그 조건 안에서 생을 마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사람들은 물리적 시간의 한계를 벗어나 저마다 고유한 주관적 시간 속에서 자신의 실존을 확장해가기도 한다. 계량적이고 한시적인 시간만이 아니라 스스로의 경험 속에서 재구성된 새로운 존재조건으로서의 시간을 사유하는 것이다. 오늘 우리에게 다가온 정현숙의 시조는 오랜 시간의 흐름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원형을 심원하게 경험하게끔 해준다. 이번 시조집은 우리 시조시단에서 돌올하게 빛날 참신한 언어적 의장意匠을 여러 차원에서 갖추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시간을 때로는 역류하여 기원에 가닿고 때로는 확장하여 심원한 역사적 지평으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렇게 선명한 감각과 사유로 짜올린 성찰의 시간이 정형의 육체 안에서 더욱 깊은 실감과 밀도를 갖추어가는 과정을 선명하게 목도하게 된다.
정현숙 시인은 다양한 사물이나 상황에 대한 경험적 실감을 정성스럽게 자신만의 언어적 화폭에 담아낸다. 더불어 일차적인 감각만으로는 담아낼 수 없는 사유의 결을 펼쳐가는데 가령 세상이 서로 공존하면서 어울리는 삶의 화음和音을 들으면서 살아있는 것들의 기운을 느끼게 해준다. 그러한 역동의 고요를 통해 시인은 사물이나 상황의 본질로 잠입하게 되고 우리는 언어를 넘어 존재하는 어떤 본원적인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된다. 정현숙 시인은 이렇게 자신의 섬세한 감각과 사유를 사물에 의탁하여 절실한 경험적 실감을 노래하는 일관성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자신의 여린 마음이 움직여가는 정형의 리듬을 통해 삶을 은유해간다. 그렇게 그의 시조는 매우 미세한 경험 맥락이 숨쉬는 순간을 가져다주면서 자신만의 감각과 사유를 사물에 의탁하여 노래하는 독자적인 인생론으로 절절하게 다가온다.
삶의 기원과 역사를 묵언처럼 담아낸 완미한 정형미학
『길 위의 생』에는 오래 침전된 삶의 기쁨과 슬픔을 다양한 시점과 언어로 변환하여 발화하는 시인의 깊은 사유와 감각이 숨쉬고 있다. 정형 양식의 단정함 안에서 시인은 차분하고도 정제된 시점과 언어를 보여주는데, 우리는 자연스럽게 그 안에서 시조라는 양식적 특성을 따라 그만의 세련되고도 심미적인 목소리를 듣게 된다. 그는 정형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가장 구심적인 사유와 감각을 응집해내는 견고하고도 생동하는 세계를 보여준다. 이번 시조집은 그러한 사유와 감각과 표현을 통해 현대시조의 새로운 미학적 진경進境을 보여주는 사례로 훤칠하게 다가오고 있다. … 그의 시편들은 일차적으로는 존재론적 현기眩氣를 수반하는 감각의 차원을 지향하지만, 어느새 그 안에 다양한 미학적 전율을 환기하는 남다른 사유 과정을 정성스럽게 배치하고 있다. 그것은 시인이 세계 안으로 자신을 온전하게 투사投射하면서 동시에 그 안에서 존재와 언어의 확산을 꾀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유성호 문학평론가 '해설' 중에서
아버지의 만년필
먼 길을 떠나시며 내 손에 쥐어주신
아버지 일부였던 생전의 만년필은
한 번도 꺾이지 않은 직필의 붓이었다
흐릿한 등불 아래 안경을 고쳐쓰며
그 많은 거친 세월 밑줄을 그어 오신
아버지 얼룩진 먹물 지워지지 않습니다
막막한 습작의 삶, 원고지 칸 건너가듯
세상일 힘들어도 되돌아보면 먹물 한 자락
오늘도 참회하듯이 시 한 편을 올립니다
백지를 메워가며 여기까지 오는 동안
온몸의 가장 깊은 시간을 가로질러
아버지 만년필 잡고 언덕 하나 넘습니다
북극곰의 눈물
다대포 모래밭에 쏟아지는 붉은 노을
세상의 모든 고요 평화를 거느리고
한 바다 장엄하게도 홀연히 입멸入滅한다
그 위에 빙하 떠난 북극곰과 철새, 펭귄
따뜻한 파도 타고 정박한 어진 그들
지구가 너무 뜨거워 난민처럼 된 걸까
어쩌리, 산성비가 잠든 이 해안에서
순금 빛 조각들의 눈물이 완성되고
인간이 벗어 둔 신발 신고 어슬어슬 멀미한다
소음을 깔고 누운 침묵의 언어 앞에
우리가 한 일들 앞으로 해야 할 일
우우우 지구를 위해 유서로 쓴 우화 한 점
* 2025.4.22일 ‘지구의 날’을 맞아 김길만 모래조각가가 다대포해수욕장 모래사장에 “북극의 빙하가 모두 녹으면 북극곰과 펭귄이 다대포 해안까지 밀려올 수 있다는 점을 모래조각 작품으로 표현, 기후 변화의 위기감을 담아냈다.
한계령에 들어서며
협곡의 고요마저 입적을 한 이 저물녘
갈 길은 저만큼인데 눈은 다시 쌓여가고
어스름 초저녁별이 서둘러서 하산한다
바람은 왁자지껄 솔가지의 눈을 털고
썰렁한 마음 마당에 홀로 와 들어앉은
오늘 밤 눈송이 하나 공중 속에 떠 있다
그 어떤 말과 빛깔 눈보다 진실할까
산맥에 갇힌 옷깃 기웃기웃 찾아드는
한계령 내경에 들어 한 사람을 생각했다
바서진 그대와 나 아직 남은 묵언들이
얼음장 꽝 깨지듯 열렸으면 참 좋은 날
봄 길목 내생을 깨워 녹의 한 벌 지으리
작가 소개
지은이 : 정현숙
1990년 <문학세계> 신인상, 1991년 <시조문학> 천료로 문단활동을 시작했다. 시조집으로 『화포리에서』 『늘 바라보는 산』 『뒷마당 생각』 『아침 우포』 『유모차와 해바라기』가 있으며, 동시조집으로 『둠벙에 살던 물방개』 『돋을볕 웃음소리』 『강물이 그리는 음표』 등이 있다. 수상으로는 성파시조문학상, 부산문학상 대상, 한국문인협회 작가상, 한국시조시인협회 본상 등을 수상했다.
목차
제1부_초록빛 페인트로 쿡쿡 찍은 손자국들
시나위젓대
아버지의 만년필
북극곰의 눈물
담벼락 명화
한계령에 들어서며
사할린, 코르사코프 항구
날지 못한 새
수원화성박물관
해당화
눈빛 목례
반구천 고래
가야의 가을
슬도에 가면
어떤 화마
제2부_연둣빛 바람이 흔드는 대숲
동백꽃 가등
오래된 팽나무집
국수 한 그릇
항아리 수족관
12월, 어느 날의 기억
학교 종
길 위의 생
느티나무 마음
뉠리리 걸음
복수초를 기다리며
흰 지팡이 주파수
이삿날
봉길리를 가다
불국토 기행
제3부_그리운 이름 외는 동백꽃
천성산 억새
밥에 대한 네 개의 이야기
산당화 손님
뻐꾹새 별사別辭
신화의 바다
대왕암
서운암을 거닐며
해운대에서
병풍산
동요되고 동화되어
그리운 아이들
도요새 사랑
랩 추는 부산
가을을 읽다
제4부_가을볕에 참깨 터는 소리
아침 바다
사람을 찾습니다
달고나
종갓집 풍경
어부의 무덤
동백섬에서
상족암
템플스테이
푸른 빛 숲길에서
유모차
아기님 오셨네
봄밤, 붓 들다
아들딸에게
화답
제5부_외롭게 울던 꽃 다 모여 피었다
갯마을을 읽다
철암 탄광촌을 다녀와서
새벽 배송
우주여행
벨루야, 안녕
절개지 파밭
콩죽
그늘을 지우다
도다리쑥국
봄꽃
바닷가 서재
봄 보자기 풀다
늪 왕국, 우포
해설_유성호
삶의 기원과 역사를 묵언처럼 담아낸 완미한 정형미학
-현숙의 시조미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