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소개
서울에 남아 있는 경성의 건축 공간 100곳을 되짚으며, 식민지 역사의 지워진 공간과 시간의 흔적을 복원하려는 시도를 담은 책이다. 저자는 1920년대 경성의 전차 노선을 기준으로 건축물 100개를 선정하고, 각 건물이 언제, 어떤 배경에서 세워졌으며 오늘날 어떤 모습으로 남아 있는지를 역사적, 건축적 맥락에서 꼼꼼하게 되짚는다.
일제강점기 네거티브 헤리티지를 둘러싼 논쟁은 오래되었다. 중요한 것은 ‘남길 것인가 지울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이다. 삭제와 미화의 역사를 넘어, 있는 그대로의 과거를 온전히 마주하고, 그 흔적 위에 지금의 우리를 비추는 일이 시급하다. 이 책은 100년 전 경성의 전차 노선을 따라 걷는 여정 속에서, 사라지고 왜곡된 시간을 다시 호출하고, 기억의 공백을 채워가는 기록이다. 저자는 일제강점기의 지배와 폭력, 근대화의 욕망, 시민들의 일상이 뒤얽힌 공간의 흔적을 담담하게 풀어낸다. 사라진 도시의 자취를 되짚는 여정을 통해, 독자는 오늘의 서울이 어떤 토대 위에서 만들어졌는지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게 된다.
출판사 리뷰
1920년대 전차 노선을 따라 만나는 경성의 건축물 100
지배와 폭력, 근대화의 시간이 뒤엉킨
경성의 건축 공간 100곳을 걸으며
지워진 식민의 역사를 복원하다
해방 이후 우리 사회는 일제강점기의 흔적을 지우는 것이 곧 민족 정기를 회복하는 길이라 여겨왔다. 그 결과 경성 시대의 건축물들은 하나둘 철거되거나 용도가 바뀌며, 그 속에 담긴 기억과 이야기도 퇴색되어 가고 있다. 그러나 역사는 불편하더라도 있는 그대로 기록되고 보존되어야 하며, 그것을 통해서 우리는 과거의 진실을 마주하고 오늘을 올바르게 성찰할 수 있다. 《경성백경》은 1920년대 경성의 전차 노선도를 따라 경성을 상징하는 100곳의 장소를 되짚으며, 지워진 공간과 시간의 흔적을 복원하고자 하는 시도를 담은 책이다. 구용산선, 태평통선, 황금정선, 마포선, 광화문선, 통의동선, 안국동선, 종로선, 총독부의원선, 청량리선, 왕십리선, 신용산선까지 열두 개 노선을 축으로, 경성의 건축 공간 100곳을 선정했다. 전차 노선이라는 이동의 흐름을 따라가며 도시를 이해하도록 한 구성은, 경성을 단순한 과거의 장소가 아니라 현재의 서울로 이어지는 살아 있는 공간으로 체험하게 하는 독창적인 시도이다.
“경성의 건축물과 도시 공간은 10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서울 곳곳에 남아 있다. 우리는 이러한 건축물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건축은 ‘적의 유산’이니 모두 철거하는 것이 옳을까. 감정적으로는 그렇게 하고 싶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눈앞에서 보이지 않게 만든다고 해서, 지우고 싶은 역사가 과연 함께 사라질까. 앞으로도 수많은 건축물은 사라지거나 변형될 것이다. 공간의 기록은 곧 시간의 기록이며, 역사의 기록이자 문화의 기록이다. 누군가는, 서울의 어제였던 경성이자 오늘의 서울이기도 한 이 도시의 기록을 남겨야 한다. 이 책은 지금이라도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는 절박함에서 시작되었다.” _들어가는 말 중에서
정밀한 답사와 고증, 500여 장의 도판으로 복원한 경성의 진짜 모습
이 책은 저자의 직접 답사와 정밀한 자료 조사에 기반하고 있다. 각 공간은 건축물의 외형과 양식을 설명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것이 세워진 시대적 배경과 설계 의도, 식민 권력과의 관계를 함께 추적한다. 더 나아가 해방 이후 이루어진 증개축과 훼손, 용도 변경의 과정까지 아우르며 하나의 공간이 지나온 시간을 입체적으로 드러낸다. 지배와 폭력의 흔적을 출발점으로 삼되, 감정에 기대기보다 사실에 기반해 객관적으로 서술한다는 점에서 이 책은 단순한 건축 해설서를 넘어선다. 100개의 장을 각 2~3페이지 내외의 간결한 분량으로 구성해 부담 없이 읽을 수 있으며, 500여 장에 이르는 풍부한 도판을 통해 과거와 현재의 모습을 한눈에 비교하고 건축 공간 곳곳을 현장감 있게 들여다보게 한다.
지금 100년 전 식민지 경성의 건축을 직시해야 하는 이유는
기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기억하기 위해서다
1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경성의 건축물들은 철거되거나 형태가 변형되었고, 그 공간에 축적되어 있던 기억과 맥락 또한 함께 사라지거나 희미해졌다. 그러나 오늘의 서울은 바로 그 ‘지워진 시간’ 위에 세워진 도시다. 물리적으로는 사라졌더라도 경성의 공간 구조와 건축의 흔적은 여전히 도시 곳곳에 남아 현재의 서울을 형성하는 토대가 되고 있다. 지금 100년 전 식민지 경성의 건축을 직시해야 하는 이유는 기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기억’하기 위해서다. 《경성백경》은 일제강점기의 건축물들을 단순한 보존의 대상이 아니라, 고통의 기억을 통해 현재를 성찰하고 미래를 비추는 계기로 바라보게 한다. 도시·건축·역사를 한 권에 아우르는 이 책은 역사 교양 독자와 도시 답사자, 건축·디자인·도시계획에 관심 있는 독자들이 기다려온 이야기를 전해주며, 오늘의 서울을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새로운 도시 읽기의 기준을 제시한다.
경성의 건축물과 도시 공간은 10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서울 곳곳에 남아 있다. 우리는 이러한 건축물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건축은 ‘적의 유산’이니 모두 철거하는 것이 옳을까. 감정적으로는 그렇게 하고 싶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눈앞에서 보이지 않게 만든다고 해서, 지우고 싶은 역사가 과연 함께 사라질까. 앞으로도 수많은 건축물은 사라지거나 변형될 것이다. 공간의 기록은 곧 시간의 기록이며, 역사의 기록이자 문화의 기록이다. 누군가는, 서울의 어제였던 경성이자 오늘의 서울이기도 한 이 도시의 기록을 남겨야 한다. 이 책은 지금이라도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는 절박함에서 시작되었다.
경복궁 광화문에서는 복원된 월대 위로 한복을 입은 국내외 관광객들이 평화롭게 거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월대 앞에서 바라본 세종대로는 길게 뻗은 광화문광장과 도로가 시원하게 이어진다. 조선의 왕이 바라보았던 경관이다. 조선 건국 때부터 경복궁의 정문이자 남문을 담당하던 광화문은 일제강점기 때 동쪽 건춘문 방향(현재 국립민속박물관 정문 부근)으로 옮겨졌다. 이곳에 조선총독부청사가 건립되었기 때문이다.
조선총독부청사는 독일인 건축가 게오르크 데 라란데Georg de Lalande, 1872~1914의 1914년 설계안을 바탕으로 건립되었다. 게오르크 데라란데는 상하이와 칭다오에서 활동했고 일본에서 건축사무소를 운영했으며, 조선에서도 여러 건축물을 설계했다. 조선철도호텔(현 조선호텔 자리)도 그의 설계로 지어졌다. 그가 갑작스레 세상을 떠난 뒤 일본인 건축가들이 설계를 이어받았고, 1916년 6월 착공해 1926년 10월 완공했다.
조선의 법궁 앞을 막아선 조선총독부청사는 식민지 지배를 상징하는 공간이었다. 1945년 일본 패망 후 조선총독과 일본군 사령관이 이곳에서 연합군에 항복 문서를 제출했고, 이후 미군정 기간에는 캐피털 하우스Capital House로 불리며 행정청사로 사용되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는 중앙청으로 명칭이 바뀌어 1983년까지 정부청사로 이용되었고, 1986년부터는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사용했다. 1995년 김영삼 정부의 과거사 청산 기조에 따라 조선총독부청사는 철거가 결정되었고, 1996년 완전히 해체되었다. 일제의 잔재를 완전히 없애고 경복궁 본래의 모습을 되찾아야 한다는 민족 정기 회복론과, 식민지 시대의 역사적 흔적을 교육과 기억으로 보존해야 한다는 보존론 사이에서 오랫동안 의견이 엇갈리며 논쟁이 계속된 끝에 조선총독부청사의 해체가 이루어졌다.
조선총독부청사는 르네상스양식의 철근 콘크리트 건물이었다. 일日자형 평면에 두 개의 중정을 두고 각 실을 기능적으로 배치한 형태였다. 이 평면 구성이 ‘일본日本’의 ‘일日’자를 본뜬 것이라는 주장도 있으나, 유럽 관공서 건축에서 널리 쓰이던 배치 형식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외벽은 화강석으로 마감되고 내부에는 대리석, 스테인드글라스, 벽화 등 최고급 장식이 더해졌으며, 중앙부의 4층 규모 돔은 멀리서도 뚜렷이 보였다. 압도적인 규모와 장식미는 조선총독부가 상징하던 절대 권력을 건축적으로 드러내려는 시도였다.
조선총독부청사가 상징하던 일제의 폭력과 지배의 흔적은 철거와 함께 사라졌다. 역사의 증거이자 기록물이었던 건물은 해체되어 대부분 건축 폐기물로 버려졌다. 그런데 철거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후 그것을 어떻게 기억하고 다루느냐이다. 적어도 이곳이 일제가 조선을 침탈하고 유린했던 장소였음을 알리는 표식은 남겼어야 했다. 기억되지 않는 역사는 반복되기 때문이다.
조선총독부청사의 잔해는 현재 세 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천안 독립기념관 뒤편 야외 정원에는 중앙 돔의 첨탑과 정초석, 화강석 부재가 놓여 있다. 인사동 옛 태화관 터에 조성된 독립선언 33인 광장에는 조선총독부청사 기둥 일부가 재활용되어 있으며, 그 돌기둥에는 독립선언서 전문이 국한문, 한글, 영문으로 새겨져 있다. 서울역사박물관 앞마당에도 조선총독부 건물의 잔해가 전시되어 있다.
한때 경복궁 앞을 가로막았던 조선총독부청사는 이제 몇 점의돌 부재部材로만 남았지만, 그 잔해와 자리는 식민지 시기의 기억과 그 이후의 선택을 함께 돌아보게 하는 역사적 흔적이다.
경복궁 서쪽 인왕산 자락에 자리한 종로구 옥인동은 흔히 ‘서촌’이라 불린다. 조선 시대에는 ‘웃대마을’로 불렸으며, 수려한 경관 덕분에 조선 후기에는 중인들이 시를 짓고 모임을 열던 공간이었다. 인왕산에서 흘러내린 물길이 만든 자연스러운 곡선을 따라 길이 형성되었고, 그 주변으로 좁고 굽은 골목과 오밀조밀한 가옥들이 자리 잡았다.
일제강점기가 시작되면서 서촌이라는 공간의 성격은 크게 달라졌다. 친일파와 식민 권력층이 넓은 토지를 차지하며 이곳에 유럽식 저택과 별장을 조성했는데, 대표적인 인물로는 이완용1858~1926과 윤덕영1873~1940이 있다. 윤덕영의 벽수산장은 1966년 화재와 도로 확장으로 사라졌지만, 이완용의 저택은 현재까지 서촌에 남아 당시의 흔적을 전하고 있다.
이완용은 1886년 육영공원育英公院에서 영어를 배우고, 미국 주재 외교관으로 근무하며 신학문을 접했다. 초기에는 개화파로 활동했으나, 1894년 청일전쟁과 1904년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자 친일로 돌아섰다. 그는 1905년 을사늑약 체결에 찬성해 ‘을사오적’으로 불렸고, 1907년 정미7조약의 ‘정미칠적’, 1910년 한일강제병합조약의 ‘경술국적’에도 이름을 올렸다. 조선을 일본의 식민지로 만든 세 차례의 조약 모두에 관여한 대가로 일본으로부터 백작 작위와 막대한 재산을 받아, 일제치하에서 최고의 부귀영화를 누린 조선 귀족이 되었다.
옥인동 저택에 대한 기록은 당시 신문 기사에서도 확인된다. 1913년 12월 6일 자 《매일신보》에는 “이완용의 옥인동 신축 저택”이라는 제목의 기사와 함께 사진이 실렸다. 기사에 따르면 그의 집은 조선식 한옥에 개량을 한 안채와 유럽식 2층 양옥의 바깥채로 구성되어 있었다. 현재 남아 있는 2층 건물이 바로 그 바깥채이다. 넓은 정원에는 여러 정원수가 식재되었고, 건물 정면 중앙에는 자동차가 현관까지 들어올 수 있도록 포치가 설치되었다. 도리아식 기둥과 1층과 2층 전면의 화려한 창호 장식은 저택의 호화로움을 보여준다.
1926년 2월 13일 이완용이 옥인동 자택에서 사망하자 조선총독과 1,300여 명이 조문했다. 《동아일보》는 “옥인동 자택에서 광화문까지 이어진 장례 행렬”을 보도하며 저택 사진을 함께 실었다. 같은 날 신문 1면에는 “무슨 낯으로 이 길을 떠나가나”라는 제목의 사설이 게재되었다. “팔지 말았어야 할 것을 팔고, 누려서는 안 될 것을 누린 자, 그 죗값을 이제부터는 영원히 받아야 할 것이다. 부등켰던 재물은 그만하면 내놓지”라는 문장은, 조선의 주권을 팔아 개인의 부귀를 누린 그에게 던진 사회적 심판이었다.
이완용 사망 후, 옥인동의 광대한 토지는 후손에게 상속되었다. 해방 이후 후손들은 대부분의 땅을 처분하고 해외로 이주했다. 그리고 1997년 그의 증손이 서울 서대문구 북아현동 일대 약 712평에 대해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소송에서 승소하여 토지를 돌려받았다. 이것은 과거 정부가 친일파 재산으로 환수한 토지였다. 법원은 ‘친일파 후손이라는 이유만으로 법률적 근거 없이 재산권을 박탈할 수 없다’며 원고의 손을 들어주었고, 항소심과 대법원도 이를 유지했다. 이후 이 토지는 약 30억 원에 매각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사건은 친일파의 재산 규정과 환수에 대한 법적 한계가 드러난 대표적 사례다.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의 국가귀속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기 이전이었기 때문에, 불법 취득 재산임이 입증되지 않는 한 후손의 소유권을 제한할 수 없다는 논리가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세대를 거듭하며 매국의 대가로 축적된 재산이 후손에게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은, 법의 판단과는 별개로 사회적·역사적 정의의 문제를 남겨두고 있다.
현재 이곳은 2003년 11월 4일 소유권보존등기가 되어 법적으로는 신축 건물로 분류된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당시 사진과 비교하면 건물의 구조와 형태가 거의 일치한다. 이에 대한 여러 견해가 존재하지만, 1926년 신문 속 이완용의 저택이 오늘날까지 남아 있음은 부정하기 어렵다. 식민의 흔적이자 부끄러운 기억의 장소로서 이 건물은 지금 서촌 한가운데에 서 있다.
작가 소개
지은이 : 김은주
건축 아키비스트이자 건축 역사학자이다. 옛 건축을 현재의 시점에서 분석하고 연구한다는 의미에서 건축 고현학자이기도 하다. 한국에서 철학과 디자인을, 일본에서 언어와 문화를, 스위스와 독일에서 건축과 도시를 공부했다. 특별히 독일에서 건축문화유산의 보존과 활용을 본격적으로 연구했다. 슈투트가르트 대학교에서 석조전 연구로 건축공학 박사학위를 취득했고, 밤베르크 대학교에서 건축문화유산 복원과 건축 연구를 진행했다.도시와 건축을 하나의 ‘기록물’로 인식하며, 국내외 건축 답사를 통해 수집한 현장 기록과 자료를 체계적으로 아카이빙하고 있다. 특히 19세기에서 20세기 초의 공유건축(Shared Built Heritage)은 연구의 중심 테마이다. 공유건축이란 기존 문화 속에 새로운 문화가 전이되거나 충돌하면서 형성된 건축을 말한다. 시간적으로는 옛것과 새것의 만남이며, 공간적으로는 전통문화에 외래 문화가 유입되어 변화된 건축과 도시를 의미한다. 전쟁 이후의 건축, 식민지 시기의 건축, 외국에서 파견된 선교사들이 남긴 종교건축 등이 공유건축의 대표적 사례이다.공유건축에 대한 질문과 해답을 찾기 위해 답사와 연구를 병행 하고 있으며, 역사적 건축물의 전용과 해석에도 관심이 많다. 건축문화유산연구소 모뉴먼트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쓴 책으로 《석조전: 잊혀진 대한제국의 황궁》, 박사학위 논문을 발전시킨 《석조전 앙상블: 한국 궁궐 단지의 역사적 맥락에서 본, 19세기 이후 추가된 의례· 대표 건축물에 관한 건축사적 연구Seokjojeon Ensemble: Bauforscherische Untersuchungen im Gesamtkontext der historischen koreanischen Schlossanlage, insbesondere der seit dem 19. Jahrhundert beigefugten Reprasentationsbauten》(독일 출간)가 있다.
목차
들어가는 글
구용산선
01 경성역 | 문화역서울284
02 조선저축은행 본점 | 신세계 더 헤리티지
03 미츠코시백화점 경성점 | 신세계백화점 본점
04 벨기에영사관 | 서울시립 남서울미술관
05 조선은행 | 한국은행 화폐박물관
06 남대문로 2층 한옥 상가 | 카페
07 조선신궁 | 철거
08 광통관 | 우리은행 종로금융센터
태평통선
09 덕수궁 석조전 | 대한제국역사관
10 덕수궁 이왕가미술관 |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
11 덕수궁 석조전 정원 | 덕수궁 석조전 정원
12 조선성공회 대성당 |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13 경성부청사 | 서울도서관
14 경성부민관 | 서울특별시의회 본관
15 미츠이물산 경성 사옥 | 폐쇄
16 경성재판소 |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
17 배재학당 동관 | 배재학당역사박물관
18 이화학당 심슨기념관 | 이화여자고등학교 이화박물관
19 싱거미싱 사옥 | 옛 신아일보사 별관
20 구세군사관학교 | 정동1928 아트센터
21 동아일보사 사옥 | 일민미술관
황금정선
22 명치좌 | 명동예술극장
23 경성신사 | 철거
24 노기신사 | 철거
마포선
25 경성감옥 | 서대문형무소역사관
26 국사당 | 인왕산 국사당
27 딜쿠샤 | 딜쿠샤
28 홍난파 가옥 | 홍난파 가옥
29 경성도립 경성측후소 | 국립기상박물관
30 죽첨장 | 경교장
31 경희궁 방공호 | 폐쇄
32 양정고등보통학교 | 손기정기념관
33 도요타아파트 | 충정아파트
34 맥렐란 가옥 | 충정각
35 신촌역 | 신촌관광안내센터
36 이화여자전문학교 파이퍼홀 | 이화여자대학교 본관
37 이화여자전문학교 토마스홀 | 이화여자대학교 무용관
38 연희전문학교 핀슨관 | 연세대학교 윤동주기념관
39 연희전문학교 스팀슨관・언더우드관・아펜젤러관 | 연세대학교 대학원본부・본관・대학원
40 상암동 일본군관사 | 상암동 일본군 관사
광화문선
41 조선총독부청사 | 철거
42 조선총독부 박물관 부속 건물 | 경복궁 관리소
43 전차 선로와 전차 363호·381호 | 전시
통의동선
44 도정궁 경원당 | 도정궁 경원당
45 보안여관 | 문화전시공간 보안여관
46 동양척식주식회사 사택들 | 상업 공간과 주거지
47 이완용 가옥 | 개인 가옥
48 통인시장 | 통인시장
49 이상의 집 | 이상의 집
50 청전 이상범 가옥 | 청전 이상범 가옥
51 배화여자고등학교 캠벨기념관・생활관・캐롤라이나관 | 배화여자고등학교 본관・동창회관・과학관
52 벽수산장 | 철거 314
53 옥인동 김덕현 가옥 | 종로구립 박노수미술관
54 옥인동 이성녀 가옥 | 옥인동 윤씨 가옥
55 인왕산 치마바위 | 인왕산 치마바위
56 칠궁 덕안궁 | 칠궁 덕안궁
57 경기도립갑종상업학교 본관・청송관 | 경기상업고등학교 본관・청송관
안국동선
58 경성의학전문학교 부속의원 |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59 북촌 한옥마을 | 북촌 근대 한옥마을
60 경기공립중학교 | 정독도서관
61 한상룡 가옥 | 백인제 가옥
62 중앙고등보통학교 동관・서관 | 중앙고등학교 동관・서관
63 중앙고등보통학교 본관 | 중앙고등학교 본관
64 고희동 가옥 | 종로구립 고희동미술관
65 송석하 가옥 | 배렴 가옥
66 태고사 대웅전 | 조계사 대웅전
67 승동교회 | 승동교회
68 천도교 중앙대교당 | 천도교 중앙대교당
69 경운동 민병옥 가옥 | 민병옥 가옥
70 이준용 공저 | 운현궁 양관
71 서북학회회관 | 건국대학교박물관
종로선
72 창덕궁 대조전 | 창덕궁 대조전
73 창덕궁 희정당 | 창덕궁 희정당
74 익선동 한옥마을 | 익선동 근대 한옥마을
총독부의원선
75 창경원 대온실 | 창경궁 대온실
76 대한의원 | 서울대학교병원 의학박물관
77 중앙시험소 |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역사관
78 경성제국대학 본관 | 예술가의 집
79 다나카 사부로 가옥 | 한양도성 혜화동 전시안내센터
80 장면 가옥 | 장면 가옥
청량리선
81 보성전문학교 본관 | 고려대학교 본관
82 안양암 | 안양암
83 최순우 가옥 | 최순우 옛집
84 심우장 | 심우장
85 보화각 | 간송미술관
86 이태준 가옥 | 수연산방
87 천도교 봉황각 | 천도교 봉황각
88 흥천사 | 흥천사
89 망우리공동묘지 | 망우리역사문화공원
90 청량리역 검수차고 | 청량리역 부속창고
91 경춘선 화랑대역 | 화랑대 철도공원
92 경성광산전문학교 본관 | 서울과학기술대학교 대륙관
93 경성제국대학 이공학부 | 서울과학기술대학교 다산관・창학관
왕십리선
94 뚝도수원지 제1정수장 | 수도박물관
신용산선
95 효창공원 | 효창공원
96 용산철도병원 | 용산역사박물관
97 한강철교・한강인도교 | 한강철교・한강대교
98 경성방직 사무동 | 카페
99 영등포 소화기린맥주 | 영등포공원
100 양천수리조합 배수펌프장 | 마곡문화원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