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리뷰
인간의 가장자리에 놓여 있던 지적장애착취와 억압의 역사를 넘어, 새로운 철학을 상상하다지적장애 연구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책, 《지적장애의 얼굴들》이 오랜 기다림 끝에 심심에서 출간되었다. 장애를 인간 존재의 한 양식으로 재사유하는 이론적 토대를 마련한 선구적인 학자 리시아 칼슨은 장애학, 생명과학, 윤리학 등을 아우르는 철학 담론을 통해 우리가 지적장애를 어떻게 바라보고, '말하지 못하는 존재'로 환원해왔는지 비판적으로 고찰한다.
《지적장애의 얼굴들》은 총 2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는 푸코의 역사-비판적 태도를 빌려 지적장애를 둘러싼 제도의 역사와 그 세계가 어떻게 젠더화되었는지를 분석해 지적장애 억압의 구조를 파헤친다. 2부는 지적장애를 '개인의 비극' 또는 '최악의 악몽'으로 여기는 주류 철학을 비판한다. 특히, 철학 담론에서조차 지적장애인이 비인간화되고 고통받는 존재로 고착되고 있음을 폭로하며, 이러한 관점에서 벗어나 지적장애를 사유하는 새로운 길을 모색한다.
저자는 지금까지 지적장애를 낯선 타자로 여겨온 기존의 담론에 변화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철학자, 정책입안자, 지적장애와 관련한 연구자, 그리고 시민사회의 구성원 모두에게 지적장애에 관한 사유의 전환을 촉구하는 이 책은 지적장애인을 포함해 그 누구도 뒤에 남겨두지 않는 공존의 실마리를 제공하는 첫걸음이 될 것이다.
“나는 우선 사람으로 알려지기를 원한다”지적장애가 던지는 질문에 철학은 어떻게 응답하고 있는가지난 4월 20일, 광화문 서십자각에는 “우리를 가두지 마십시오”라는 외침이 울려퍼졌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등 진보적 장애인권 단체들은 비 오는 날씨에도 우비를 입고 시혜와 동정의 맥락이 담긴 '장애인의 날'을 거부하며 '장애인차별철폐의 날' 집회를 이어갔다. 그중에서도 발달장애인 당사자 중심 단체 한국피플퍼스트는 발달장애인권리보장 촉구대회를 열어 “발달장애인 스스로 삶을 결정할 권리”를 외쳤다.
“나를 인간의 얼굴로 보라”는 발달장애인 당사자들의 외침은 발달장애인법 제정 등 제도적·법적 차원에서 많은 변화를 이끌어가고 있다. 그러나 장애인, 특히 지적장애인이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환대받고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하긴 어렵다. 여전히 많은 지적장애인이 자신의 삶을 결정할 자유를 빼앗긴 채로 시설에 갇혀 신체적·성적 학대에 노출되는 등 권리를 침해당하고 있다. '지적장애'는 욕설로 사용되며 우리는 일상적으로 '지능'의 높고 낮음을 운운하는 사회에서 살아간다. 비판적 학문 내부에조차 지적장애인에 대한 철학적·이론적 분석은 미비한 실정이다.
“혹시 가족 중에 장애인이 있나요?”(13쪽) 지적장애에 관심이 있다는 저자의 말에 동료 철학자들은 그에게 묻곤 했다. 그런 게 아니고서야 비장애인이 지적장애를 둘러싼 문제에 관심을 가질 리 없다는 믿음, 지적장애에 대한 철학의 일관된 무관심은 저자에게 충격을 주었다. 칼슨은 인간이라는 테두리, 시민이라는 테두리 내부에 이들의 자리를 단단하게 마련하기 위한 철학적 담론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지적장애의 얼굴들》은 지적장애를 둘러싼 기존의 담론을 날카롭게 분석하고, '말하지 못하는 자'가 아닌 '앎의 주체'로 지적장애인을 호명함으로써 새로운 담론의 씨앗을 심는다.
철학, 장애학, 윤리학의 교차점에서 지적장애를 사유하다지적장애는 어떻게 사회에서 몰아내야 할 '악몽'이 되었나《지적장애의 얼굴들》은 2010년 미국에서 출간된 이래로 장애학 연구자들 사이에서 줄곧 지적장애 연구의 기준점이 되었던 선도적인 저작이다. 리시아 칼슨은 지적장애를 둘러싼 철학적 담론, 사회적 상상력, 정책적 기획이 어떻게 구성되어왔는지를 비판적으로 분석한다. 저자는 1, 2부에 걸쳐 지적장애를 철학적으로 사유할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서로 다른 학문의 전문가들이 주체가 되어 지적장애가 있는 사람들을 정의하고, 연구하고, 시설에 수용하고, 꼬리표를 붙이는 한, 이들은 계속해서 지식의 객체로 남게 되기 때문이다. (200쪽)
특히, 철학자들은 지적장애를 비인간화하고 특정한 면만을 부각시키는 역사를 반복해왔다. 이들은 정신지체와 같은 상태는 '객관적으로 나쁘다'는 믿음을 바탕에 두고 지적장애인이 인격체인지, 지적장애인을 동물과 구분할 수 있는지 등을 질문하거나, 기존의 철학적 논의를 한계까지 밀어붙이기 위한 가장자리의 사례로 지적장애를 활용했다. 피터 싱어가 동물권을 옹호하기 위해 지적장애인을 '인간보다 동물에 가까운 존재'로 호명한 방식이 대표적이다. 칼슨은 이러한 비유가 지적장애인이 인간만이 겪을 수 있는 고유한 형태의 억압을 가리고 지속시킬 수 있음을 지적한다. (303쪽)
중증 지적장애인 집단이 종차별주의를 반박하기 위한 사례로 선택되는 것은 이들이 대개 인간보다 동물과 더 많은 공통점을 지닌다고 여겨지기 때문만은 아니다. 짐작건대 중증 지적장애인이 근본적으로 타자로 인식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 사회적·철학적으로 주변화된 이 집단이 철학 문헌 속에 드러날 때조차도 단편적이고 왜곡된 혹은 전형적인 모습으로 자주 제시되는 점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또한 싱어의 작업이 어느 주변화된 집단(동물)에 대한 신화를 깨고 '무비판적이고 안이한 가정'을 반박하려는 데 목적이 있음에도 또 다른 집단에 대한 신화와 가정을 여전히 그 바탕으로 삼고 이를 지속하고 있다는 점이 매우 안타까울 따름이다. (279쪽)
마찬가지로, 지적장애인의 '고통의 얼굴'은 이들이 실제로 경험하는 학대 및 폭력, 이를 개혁하고자 하는 반복적인 외침을 비가시화하는 동시에 “'지적장애를 지닌 사람은 특정한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널리 퍼진 믿음과 가정”(314쪽)을 강화한다. 장애와 고통의 동일시, 고통의 불가피성에 대한 이러한 믿음은 산전 유전자 검사의 모습으로 우리 앞에 나타나고 있다. 칼슨은 우리 사회가 성별을 이유로 한 임신중절은 비판하면서 장애의 원인이 되는 유전자가 있는 태아에 대한 임신중절에 대해서는 수용적인 태도를 보이는 점을 꼬집는다. “장애에 대해 차별적 견해를 지닌 사회, 그리고 장애인의 충만한 삶을 가로막는 구체적 장벽을 지닌 사회”(315쪽)야말로 지적장애인 당사자에게 중대한 고통을 준다는 사실은 산전 검사에서 중대하게 여겨지지 않는다.
지적장애의 착취와 배제에 연루된 여성들칼슨은 지적장애에 관한 지식이 수집되고 생산되는 과정에 이루어진 독특한 변화 중에서도 젠더화에 주목한다. 이러한 관점은 페미니즘과 장애를 다룬 문헌 안에서조차 지적장애라는 문제가 다소 주변화되어 있고, 지적장애의 세계에서 젠더가 어떠한 역할을 수행했는지에 대한 분석이 드물기 때문에 큰 의미가 있다.
여성이 돌봄에 타고난 역량이 있다는 고정관념은 장애인 거주시설에서 여성이 돌봄 제공자로 자리매김하는 데 일조했다. 어머니 집단은 자녀의 정신박약의 원인으로 지목되었고, 이는 정신박약 여성의 재생산권을 현저히 제한했다. 일부 비장애인 여성들은 남성보다 '직관적이고 사교적이고 순종적'이라 여겨진 덕에 우생학 가계도 연구원으로 일종의 지식 생산자가 될 수 있었다. 여성 내부의 구분짓기는 여성 개혁가들에게서도 발견되었다. 마거릿 생어 등 20세기 여성 페미니스트들은 여성의 재생산권을 주장하기 위한 도구로 우생학 담론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젠더와 지적장애의 관계를 해석하는 방식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그러나 이는 단순히 젠더가 지적장애 범주에 대한 정의와 그에 따른 실천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 알려주는 것을 넘어선다. 지적장애 역사의 젠더화된 차원을 분석해보면 지식 객체와 지식 주체 간의 단순한 관계를 넘어 훨씬 더 다채롭고 변화무쌍한 문제들이 드러난다. /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지적장애 분류의 역사와 본질이 이것을 태동케 한 복잡한 권력관계의 그물망에서 결코 분리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166쪽)
칼슨의 분석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정신박약 여성이 경험한 억압이다. 정신박약 여성은 “정신박약 개념과 여성성에 대한 고정관념이 교차하면서”(118쪽) 정신박약 범주의 위험한 특성을 대표하는 상징으로 지목되었다. 이들은 시설 바깥에서는 성 규범을 왜곡시키고 도덕적·지적 상태가 개선될 수 없다 여겨졌으나, 시설 내부에서는 여성성의 진수인 돌봄을 체현하고 유용한 노동력으로 인정받기까지 했다. 즉, “정신박약 여성은 자신의 본질을 규정하는 상충되는 정의들에 종속”(133쪽)되어 있었고, 이는 다름 아닌 시설의 자기 보존을 위해서였다. “완전한 여성 또는 엄마로 정의될 수 있는 자의 존재는 여성성과 모성이 허락되지 않은 자들의 존재를 전제로 하는가?”(168쪽)라는 칼슨의 절박한 질문은 오늘날 페미니즘이 '결함 있는 자들'과 함께하고 있는지에 대한 물음이기도 하다.
예속된 지식 너머의 얼굴을 그리다칼슨이 철학과 지적장애의 교차에 천착한 까닭은 철학이 우리가 이미 지나온 지적장애의 묘사를 반복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지적장애를 '결여된 존재', '비시민적 존재'로 환원해온 역사가 “누가 인간이며, 누가 시민인가?”라는 철학적 질문을 우리에게 돌려주기 때문이기도 하다. 무엇이 지금까지 지적장애인을 절대적 타자로 그려왔는지 질문함으로써, 우리는 새로운 연대의 가능성을 모색할 수 있다.
다행히도, 철학 담론 내부에서는 예속된 지식을 드러내기 위한 변화의 물결이 서서히 일어나고 있다. 피터 번, 에바 키테이, 수전 웬델 등은 비판적 장애 접근에 뿌리를 두고 당사자의 주체성과 응답가능성을 긍정하며 당사자와 관계 맺는 이들에게 귀기울이는 철학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지적장애의 얼굴들》은 바로 그 철학으로 향하는 전환점이다. 지적장애인 가족과 맺은 관계를 엮어낸 철학자들의 글에서 “관습에 따라 흐릿하고 추상적인 방식으로 그려졌던 중증 지적장애인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얼굴, 곧 한 인간의 얼굴을 또렷이”(242쪽) 마주할 수 있듯이, 리시아 칼슨은 지금껏 듣지 못했던 선명한 목소리 앞으로 우리를 데려다 줄 것이다.

영화 제작자의 세계관에서 철학자의 세계관으로 시선을 옮기면, 지적장애가 철학자들에게도 ‘최악의 악몽’임을 암시하는 묘사를 발견할 수 있다. 이 책은 이런 현상을 이해하고, 철학을 따라다니며 그늘처럼 떠도는 지적장애의 여러 얼굴을 드러내려는 시도다. _
<들어가며 철학자의 악몽> 중나는 현대 철학 담론에서 지적장애가 구현되는 구체적 양상을 역사적 세계와 나란히 놓음으로써 지적장애를 다루는 철학 담론이 역사적 우연의 산물임을 드러내고, 더 나아가서 지적장애를 다르게 사유하는 것이 윤리적 맥락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상상해보고자 한다. 중증 지적장애인과 비인간 동물을 긴밀하게 연결 짓는 방식과 이로 인한 비인간화의 위험, 고통과 장애를 동일시하는 문제, 지적장애인을 피해자나 주변 사람에게 깊은 고통을 안겨주는 존재로 묘사하는 주류 방식에 도전하는 일이 포함된다. 도덕적 세계의 경계를 구분 짓는 시도에 내재된 배제의 방식과 특정한 타자를 도덕적 주체로 구성하거나 소외시키는 “우리”의 미심쩍은 방식을 문제 삼는 것은 “우리가 지금과 같이 존재하고 행하며 사유하지 않을 가능성”을 향한 한 걸음이다. _
<들어가며 철학자의 악몽>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