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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 물고기
여우난골 | 부모님 | 2026.0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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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서 소개

권혁재 시인의 여섯 번째 시집 『투명 물고기』(시인수첩 시인선 107)가 출간되었다. 4부의 69편으로 구성된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보이지 않는 것들의 자명함’이라는 역설적 명제를 시적 방법론으로 보여준다. 사랑·노동·소멸·AI 시대의 인간성이라는 네 축을 하나의 감각 위에 올려놓는 시집의 표제작 「투명 물고기」는 그 방법론의 정수다.

  출판사 리뷰

보이지 않아서 더 선명한 사랑의 물리학

권혁재 시인의 여섯 번째 시집 『투명 물고기』(시인수첩 시인선 107)가 출간되었다. 4부의 69편으로 구성된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보이지 않는 것들의 자명함’이라는 역설적 명제를 시적 방법론으로 보여준다. 사랑·노동·소멸·AI 시대의 인간성이라는 네 축을 하나의 감각 위에 올려놓는 시집의 표제작 「투명 물고기」는 그 방법론의 정수다.
“내 사랑을 당신에게 보여줄 수 없을까 / 체온만 겨우 남은 당신 사랑 때문에 // 스쳐도 느끼지 못한 / 지느러미 흔적들 // 뒤에서 밀고 오는 그 파문의 힘으로 / 사랑의 맹세를 새길 수 있을까 // 지워도 훤히 보이는 / 유리 같은 손바닥에 // 당신이 울수록 떨어지는 물빛 비늘 / 사랑을 다 비워낸 당신의 // 드넓은 바다 같아서 / 손을 대도 닿지 않는 당신” (「투명 물고기」) 투명하다는 것은 ‘없음'이 아니라 '완전히 노출된 있음’이다. 권혁재 시인은 그 투명성 안에 사랑의 존재 방식을 새긴다. 손을 대도 닿지 않지만 “지워도 훤히 보이는 유리 같은 손바닥”, 이 불가능한 가시성이야말로 이 시집 전체를 관통하는 미적 원리다. 사랑은 소유할 수 없지만 지울 수도 없다. 권혁재 시인은 그 불가능성을 시의 정확한 언어로 빚어낸다.
1부는 바다와 노동 현장을 배경으로 삶의 물때를 기록한다. 「바다노래방」의 막교대에 매인 그녀, 「진폐증」의 탄광 노동자, 「명예 사원증 수령한 날」 33년의 직장인이 동일한 무게로 시의 지평을 열며 「밥집에서」의 마지막 밥알 하나가 연대의 손짓을 건넨다. 2부는 풍경이 확장된다. 갯벌·포구·강이 사랑의 지리학이 되고, 「AI 아내들」은 AI가 18세기 열녀를 소환하는 현재를 정밀하게 포착한다. 3부는 시인의 미학적 핵심부다. 표제작을 비롯해 「카페 흰 당나귀」, 「회화나무」, 「점안(点眼)」, 「탈고(脱稿)」 등 시인의 문학관과 사랑론이 가장 고밀도로 응축된 작품들이 자리한다. 4부는 소멸과 기억의 영역이다. 「먼 길」은 떠난 할머니를 열꽃이라는 이미지로 완성하고, 「12월」은 소멸이 해마다 반복되어도 인간은 여전히 아프다는 것을 담담하게 받아들인다. 「길 끝에서」의 종착지 선언이 그 뒤를 받으며, 시집은 하나의 원으로 닫힌다.
“다음 이후의 다음은 없다 // (중략) // 아침 출근길에 횡사를 한 사람들 // 저녁에 보자던 약속은 / 다음 이후의 약속이 되었다 //누가 밥 한번 먹자고 하면 / 다음보다는 /지금이라고 / 분명하게 대답할 때 / 다음다운 다음이 있다” (「다음 이후의 다음은 없다」) 이 시는 ‘다음에 밥 한번 먹자’는 일상 언어에서 삶의 유한성을 끌어낸다. “저녁에 보자던 약속은 / 다음 이후의 약속이 되었다” 시인은 여러 참사와 산업재해를 직접 거명하지 않는 대신 그 자리에 ‘횡사’라는 시어를 통해 독자의 기억과 연결한다. 단순한 문장이지만 하루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위태로움과 허망함을 각성하게 하는 시인의 힘, 이 시인의 언어가 가진 힘이다.
이어 창작 행위 자체를 해부한 자기 메타시인 생선 비늘을 벗기는 행위로 원고 탈고를 비유한 이 시는 창작의 폭력성과 아름다움을 동시에 드러낸다. “맨살을 드러낸 눈이 / 심해처럼 깊다”(「탈고」). 시인에게 탈고는 바다를 지우는 마지막 제의(祭儀)다. 언어 예술에 대한 시인의 인식론적 성실성이 가장 압축된 형태로 빛나는 작품이다. 권혁재의 시는 보이지 않는 것을 증명하려 하지 않는다. 다만 그 자리를 정확하게 가리킨다. ‘물빛 비늘’, ‘민어의 울음소리’, ‘유리 같은 손바닥’이 감각들은 사랑의 실체를 붙잡으려는 언어가 아니라, 사랑이 지나간 자리의 온도를 재는 언어다. 투명하다는 것은 없음이 아니라 완전히 노출된 있음이듯, 보이지 않는 것은 오히려 가장 선명하게 남는 것이다. 그는 노동의 현장과 사랑의 언어에서 동일한 물리적 정확성을 요구한다. 막교대와 진폐, 해고와 택배 그 단어들이 사건의 증거이듯, 손을 대도 닿지 않는 당신과 지워도 훤히 보이는 손바닥은 그에게 투명한 증거다. 소유할 수 없지만 지울 수도 없는 것. 그것이 이 시집이 끝내 도달한 사랑의 물리학이다.
그 물리학은 AI 시대의 젠더 정치학으로도 확장된다. 「AI 아내들」은 “십팔 세기 열녀가 돌아왔다”는 선언으로 시작해, 최신 기술이 복원하는 것이 편의가 아니라 봉건적 여성상임을 날카롭게 담아낸다. “문명에 바랜 애교를 한 세기로 앞당겨 놓고 / 돈 버는 노비로 전락한 남정네를 / 전란에 출정하는 전사로 치켜세우는” AI의 이면을 냉소적으로 포착하는 한편, 「AI의 애인」은 그 반대편을 조명한다. 늦은 야근 끝에 돌아오는 남자에게 건네는 “수고했다”는 한마디와 “오빠!”라는 호칭 등, AI가 충족시키는 것은 기능적 필요가 아니라 인정의 결핍이다. 이 두 편을 맞붙여 읽을 때 독자는 AI가 여성에게 가하는 압력과 AI에 기대는 인간의 공허가 하나의 구조 안에 맞물려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시인은 판단을 유예한 채 시 속의 AI 초상을 최소한의 언어로 완성한다.
시인은 산문 「혁명적인 에너지를 갖고 있는 시의 힘」에서 존 스타이너의 '빚진 사랑' 개념을 자신의 시작(詩作) 원리로 명시한다. 시인의 이런 시편들은 사회의 주변부에서 제 몫을 다하며 살아온 이들 막교대 노동자, 진폐 광부, 해고 직원, 택배 기사, 외로운 술꾼에게 진 사랑의 부채를 시의 형식으로 돌려주는 헌정(獻呈)이다. 밥 한번 먹자는 말 한마디에서 하루 앞을 모르는 삶의 실체를 각성시키고, 생선 비늘을 벗기는 손끝에서 창작의 폭력과 아름다움을 동시에 건져 올리는 시인. 권혁재 시인의 언어는 광장이 아니라 탁자 모서리의 밥알 한 톨에서 혁명을 시작한다. 그 혁명은 조용하고, 정확하고, 오래 남는다.

◨ 시인의 산문 엿보기

혁명적인 에너지를 갖고 있는 시의 힘

#1
이른 아침부터 안개가 짙게 끼었다. 짙은 안개를 지나치는 차들이 비상등을 깜박이며 서행을 한다. 안개의 길에는 아무도 다니지 않았다. 안개의 길에는 안개만 있을 뿐, 그 누구도 접근을 허락하지 않는다. 희미한 하나의 터널 같은 것이 모두를 집어삼킬 것 같은 거대한 입이 되었다가 다른 한편으로는 덫처럼 보이기도 하였다. 안개의 길은 바다와 잇닿아 있었다. 바다에 닿은 차는 다시 안개 속에 묻혔다. 비상등을 켜고 서행을 하는데, 물이 빠진 검은 갯벌이 오체투지로 기어 오고 있다. 갯벌 바닥에 드러누운 작은 배들은 목줄을 맨 강아지처럼 얌전히 있었다. 귀에 익은 목소리에 주위를 둘러보니 바다가 보고 싶다고 몇 번이나 중얼거렸던 그녀가 방파제 쪽에 있는 크레인 밑에 작은 그림자로 서 있었다. 바다를 보고 싶어하는 그녀의 바람과는 달리 막교대에 매여 갈 시간이 없는 그녀의 물때는 하루 두 번이 아니라 매일매일이 물때였던 팍팍한 삶을 살면서 혼자 떠 있는 섬이 되어 물살 깊은 바다의 노래를 부르곤 하였다. 바다는 삶이나 생명의 근원적인 욕망을 인식시켜 주거나 소거해 주는 공간적인 요소이지만 그녀의 지난한 삶과 사랑은 안개에 갇히거나 매일이 물때 같은 앞날을 예측할 수 없는 불확실성의 연속이나 다름없었다.

막교대에 매여 갈 시간이 없다는
박자를 놓친 그녀의 노래에서

그녀의 물때는 하루 두 번이 아니라
매일매일이 물때였다는 것을 알았지

하루 같은 물때에 혼자 섬으로 떠 있는
그녀의 노래는 물살 깊은 바다의 노래였지
-「바다노래방」 부분

바다는 삶과 생명을 끝없이 연결하는 공간이기도 하지만 죽음을 받아들이고 한 세계를 폐쇄하는 어두운 공간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오래전에 막역한 친구와 동해의 작은 포구인 공현진에서 방파제 낚시를 한 적이 있었다. 속초에서 머무는 동안 내내 공현진으로 차를 몰고 가서 낚
시를 했다. 어쩌다 보리멸이 잡혀도 고함을 지르며 기뻐했다. 그러다 몇 년 후 사업 실패와 그에 따른 화병으로 인한 과음으로 그 친구는 결국 병을 얻어 사망하였다. 젊은 나이에 받아들이기 어려운 사건이자 죽음이었다. 그 후로 동해안에 여행을 와서 공현진을 지나칠 때마다 술잔을 기울이던 그의 큰 눈이 떠올라 차를 세우고 술 한 병을 통째로 그에게 주곤 하였다. 그의 애인 이름과 비슷하다던 항구에서 그의 흔적을 더듬으며 바다를 안고 애인 곁으로 돌아가기를 바랐다.

네 애인 이름과 비슷하다던
동해의 한 항구에서

외로움의 깊이만큼 목에 잠겨오는
사랑한다는 말을

한 여자의 발밑에
비리게 뱉어놓고

너는 죽어서야 바다를 안고
애인 곁으로 돌아갔다
-「공현진 2」 부분

내 사랑을 당신에게 보여줄 수 없을까
체온만 겨우 남은 당신 사랑 때문에

스쳐도 느끼지 못한
지느러미 흔적들

뒤에서 밀고 오는 그 파문의 힘으로
사랑의 맹세를 새길 수 있을까

지워도 훤히 보이는
유리 같은 손바닥에

당신이 울수록 떨어지는 물빛 비늘
사랑을 다 비워낸 당신의 얼굴빛이

드넓은 바다 같아서
손을 대도 닿지 않는 당신
-「투명 물고기」 전문

살구꽃들이 연탄가스를 마시고
집단자살을 하였습니다

어머니가 중지를 잘라내고 온 날
죽은 집이라고 소문을 내듯이

살구꽃들은 일제히 연탄가스를 마셨습니다

새봄이 들고 연탄보일러 배관을
아버지가 뒤란 살구나무 쪽으로 바꾸고부터

꽃을 버린 나무는 열매도 맺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의 푸념 섞인 독기가
연탄가스로 배출되어 꽃들이 겁을 먹었는지

이듬해에도 꽃은 피지 않았습니다
가끔 어머니의 잘린 중지 끝으로

통증이
빚쟁이처럼 왔다가 갔습니다
-「미필적 고의」 전문




다음 이후의 다음은 없다

다음은 언제나 다음 이전에 있어야
다음으로서 가치가 있다

다음이라는 말미도 없이
아침 출근길에 횡사를 한 사람들

저녁에 보자던 약속은
다음 이후의 약속이 되었다

누가 밥 한번 먹자고 하면
다음보다는
지금이라고
분명하게 대답할 때

다음다운 다음이 있다
-「다음 이후의 다음은 없다」 전문

  작가 소개

지은이 : 권혁재
경기도 평택 출생.단국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박사 졸업.2004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시집 『투명인간』 『안경을 흘리다』 외 다수.2018년 『안경을 흘리다』, 2020년 『당신에게는 이르지 못했다』 아르코 우수도서 선정.2023년 애지문학상 수상.

  목차

시인의 말·5

1부
바다노래방·15
공현진 2·16
독감·18
홍매화·20
진폐증·22
야행성 고독·24
물속의 달·26
난각(卵刻) 2·27
군산 오름·28
페스로 가는 휴게소·29
편도행 삼탄역·30
흥주사 은행나무·32
울음이 키운 나무·33
정인·34
다음 이후의 다음은 없다·36
서브미션·37
밥집에서·38

2부
새벽 바다·43
미필적 고의·44
밥 한 그릇·46
무인기·47
모항·48
애정리·49
달을 낳다·50
내파수도·52
빨간 찔레꽃·53
대평리 포구에서·54
야근·56
명예 사원증 수령한 날·57
면천 느릅나무·58
무말랭이·59
노래 가인을 들으며·60
마지막 월급·61
AI 아내들·62

3부
투명 물고기·65
카페 흰 당나귀·66
회화나무·68
한과·70
시집을 받을 때·72
점안(点眼)·74
한과 2·76
아야진에서·77
택배가 끊겼다·78
어린 외숙(外叔)·80
달빛 윤슬·81
여강·82
탈고(脱稿)·84
고한역·85
물수국·86
마지막 모텔·88
눈물·90

4부
먼 길·93
그때쯤의 새들·94
간월암 팽나무·96
백합탕·97
AI의 애인·98
길에서 만난 시·100
나목·102
정규직 키오스크·104
12월·105
가인·106
당신을 복사하다·107
벌천포 여자·108
겨울 개심사·110
풍랑주의보·111
샌드백·112
만항재·113
격포 여자·114
길 끝에서·116

산문 | 권혁재
혁명적인 에너지를 갖고 있는 시의 힘·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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