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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공에 슬며시 몸을 밀어 넣다
책과나무 | 부모님 | 2026.0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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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서 소개

오랫동안 시와 소설로 자신만의 문학 세계를 꾸준히 펼쳐 온 문학철 작가의 다섯 번째 시집. 시인은 “시를 쓰는 일은 / 말로써 / 삶을, / 죽음을 / 느끼고 겪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번 시집에는 자연과 계절, 산과 강, 바람과 빗소리 속에서 삶과 죽음, 상실과 그리움, 그리고 다시 살아가는 마음을 천천히 어루만지는 시편들이 담겨 있다.

특히 먼저 떠난 아내를 향한 그리움은 시집 곳곳에 깊게 배어 있다. 그러나 이 시집은 단순한 상실의 기록에 머물지 않는다. 솔숲과 빗소리, 강물과 감나무 같은 자연의 풍경 속에서 삶을 다시 받아들이고 건너가는 마음이 잔잔하게 펼쳐진다.

60여 편의 시는 자연과 인간, 기억과 현재,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길어 올린 사유와 감정이 담겨 있다. 꾸밈없는 시어와 담백한 문체는 긴 여운을 남긴다. 삶이 문득 버거워지는 날, 이 시집이 잔잔한 위안을 건넬 것이다.

  출판사 리뷰

“비우지 않고도 가벼운 것들이 꽃으로 핀다”
삶과 죽음 사이, 허공을 건너듯 써 내려간 시의 언어


문학철 시인의 시에는 과장된 슬픔이나 요란한 감정이 없다. 대신 솔숲을 스치는 바람과 빗소리처럼 조용히 스며드는 문장들이 있다. 『허공에 슬며시 몸을 밀어 넣다』는 삶의 무게와 상실의 시간을 지나온 한 시인이 자연 속에서 다시 삶을 받아들이고, 천천히 마음을 비워 가는 과정을 담아낸 시집이다.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 끊임없이 자연의 움직임과 삶의 시간을 겹쳐 놓는다. 새는 “뼛속까지 비워 / 허공에 / 길을 내고”, 봄비는 솔잎 사이로 스미며 숲을 깨운다. 강물과 바람, 구절초와 감나무 같은 익숙한 풍경들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삶을 견디고 건너가게 하는 존재들로 시 속에 머문다.
특히 시집 곳곳에는 먼저 떠난 아내를 향한 그리움과 애도의 마음이 잔잔하게 흐른다. 「달무리」, 「다담茶談」, 「귀울음」 같은 시편들은 함께 살아온 시간과 사소한 일상의 기억들을 담담하게 불러낸다. 그러나 시인은 슬픔만을 붙들고 머물지 않는다. 상실 이후에도 계절은 다시 오고, 산천은 바쁘게 흐르며, 삶은 끝내 다시 살아 내야 할 시간이 된다.
이번 시집은 불교적 사유와 자연 친화적 감각 또한 짙게 배어 있다. ‘피안’, ‘허공’, ‘만월’, ‘청복’ 같은 시어들은 비우고 내려놓는 마음의 태도를 드러내면서도, 어렵거나 관념적으로 흐르지 않는다. 오히려 메로나, 칼국수, 머위, 우산 같은 생활의 사물들을 통해 삶의 온기와 그리움을 더욱 선명하게 보여 준다.
무엇보다 문학철 시의 힘은 담백함에 있다. 천천히 읽다 보면, 삶과 죽음 사이의 아득한 숲길을 더듬더듬 걸어가는 한 사람의 마음이 조용히 전해진다. 그리고 그 길 끝에서 독자는 어느새 자신의 삶과 그리움 또한 함께 돌아보게 된다.

비우지 않고도 가벼운 것들이 꽃으로 핀다

새는 뼛속까지 비워
허공에
길을 내고

커다란 바퀴 굴리지 않아도 굴러가듯이,

(중략)

무게 없이 떠오른 물빛, 솔잎에 맺혀
마침내 빗방울로
투닥


투닥 닥
우산 위에서 봄비로 노닌다

그 소리 내 몸 드나들며

가득 채운다
산천을
깊은 잠에서 깨운다

낙락장송 위로 올 만월滿月을 기다려
연둣빛 우산 받쳐 들고
바람 살랑이는 그늘 깊은 솔숲길
젖빛 허공에 슬며시 몸을 밀어 넣는다

안거安居 푼 진달래 손톱 끝 진홍으로 붉다

_「허공에 슬며시 몸을 밀어 넣다」 중에서

잊히지 않는 기억은 감정의 못에 박혀 있다

기쁨보다는 슬픔이 슬픔보다는 억울함이
억울함보다는 무서움이 분노가
들은 것보다는 겪은 것이

(중략)

상처를 건드리는 말은 소금이다

아프면 내게 묻는다
상처에 스친 소금은 아닌지
아파하면
저의 상처를 헤집은 건 아닌지

감염되면
작은 것도 큰 흉터로 남는다
대못으로 남는다

오랜 세월 박혀 뽑지 못할 못이 된다

_「못과 소금」 중에서

월급을 명세서가 붙은 누런 봉투로 받을 때였습니다
시골에 아파트를 마련했습니다

전업주부인 선녀는
월급 전날
만 원 하나만 있었으면 노래했습니다

거실에서 빨래를 개고 있었습니다
선녀가 환호성을 올렸습니다
남방 주머니에선가 천 원 한 장 나왔나 봅니다

(중략)

선녀의 함박웃음으로 거실이 환했습니다

통나무집에서 생맥주 한잔?

아이들은 잘 자고 있고
선녀랑 살짝 아파트 밖으로 나와
우산 하나로
아파트 마당을 가로질러 내려갔습니다

안주 안 시켜도 되나요?
선녀가
가게 문을 열고
얼굴만 들인 채 조심스레 물었습니다

반 층 높은 뒤뜰 창가 자리에 앉았습니다
500cc 두 잔 팝콘 한 접시 앞에 두고
세상, 넉넉하고 푸근했습니다

가끔 투둑투둑 빗소리가 창문을 두드렸습니다

_「옛날 옛적에」 중에서

  작가 소개

지은이 : 문학철
• 《주변인과문학》 편집주간 역임• 한송예술협회 이사장 역임시집, 『산속에 세 들다』 외 다수장편소설, 『황산강』시 감상집, 『관광버스 궁둥이와 저는 나귀』

  목차

시인의 말

1부 입동 즈음에

명예
감꽃
허공에 슬며시 몸을 밀어 넣다
빗소리 읽다
삼성반월교
봄날 아침에
봄비에 널다
못과 소금
입동 즈음에
살구나무 꽃그늘에서
피안彼岸으로 가는 길
산천은 바쁘다
빈집에 드네
솔잎도 나도
극락암 영지影池에서

2부 옛날 옛적에

나뭇잎 편지[葉書]
구절초
옛날 옛적에
그대 하늘에 귀 하나 걸다
부처님 오신 날
인연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
달무리
귀울음
모순
이별가
다시, 고군산군도
다담茶談
민들레꽃
토닥토닥

3부 외줄 한 가닥

저물녘 고향
사자평에서
손칼국수를 먹으며
외줄 한 가닥
코뚜레
이 봄에
저문 날을 걷다
입추에 변명하다
청복淸福
머위 같은 시 한 편
감나무, 단풍, 시
지우개
깊은 밤, 비에 젖다
오십천 지품 가는 길
깃발

4부 부치지 않을 편지

또, 봄날은
너는 누구냐
봄눈
우수 경칩 어름에
신록
이산移山
뗏목
처서處暑 무렵
떨감
부치지 않을 편지
초우初虞 지내고
상족암 동굴에서
구절초 새로 쓰다
나뭇잎에 쓰네
붉은 해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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